경주 원원사지 동,서 3층석탑
경주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과거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사찰이였던 원원사에 있었던 두개의 3층 석탑이다.
원원사지 3층석탑의 위치
경주 원원사지 3층 석탑은 경주와 울산의 길목인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 있는 봉서산 기슭에 있는 원원사 터에 있다.
원원사지 3층석탑 가는길
울산에서 경주를 잇는 길목인 7번국도에서 2.7km 걸어야 한다.
걸어서 40분, 자전거로 10분이라지만, 산길이여서 더 걸린다.
실제로 본인은 산길이여서 쉬엄쉬엄 갔더니 1시간정도 걸린것 같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모화리, 한 때는 기차역도 있던 지역이지만, 현재는 기차역도 폐쇠되고 낙후되고 있는 도시이다.
울산 창평동,송정동까지 이어지는 송정터널 공사장
오른쪽은 모화저수지이다.
다시 산길로.....헉헉 힘들다..
모화리
모화 저수지, 마치 유럽의 호수처럼 별장의 몇 채 지어져있다.
원원사 계곡
원원사입구
원원사
현재의 원원사는 신라시대 절인 원원사와 관계없는 개인 사찰이다.
사찰이 원원사지 터 아래에 지어져있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야 한다.
원원사 종루의 오른쪽으로 가면 계단이 나온다.
원원사지 입구에 세워진 돌
원원사지로 가는 입구는 현대에 복원된 것이 아닌 옛것 그대로 이다.
원원사지
원원사지에는 1933년에 복원한 두개의 3층석탑과
동북 계곡 500m 떨어진 곳에 석종형 부도 3기,
서북 계곡300m 떨어진 곳에 부도 1기,
용당이라고 불리는 신라의 우물터 1기,금당터 등이 존재한다.
현재 사적 46호로 지정되어있다.
원원사가 지어진 이유는
사찰이 지어지기 전인 7세기 후반은 신라가 막 통일된 무렵이였는데,
이 시기는 세계 최강 대국인 당나라와의 싸움과 통일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웠다.
그리하여 신라의 고위층들은 호국에 온 힘을 쏟았고, 전국 곳곳에 호국 사찰을 연이어 세웠다.
원원사도 이러한 목적으로 지어진 호국사찰 중 하나로,
명량대사의 후계자인 안혜,낭융 등과 신라의 장군인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등 신라의 고위층들이 뜻을 모아 지었다.
실제로 호국적인 사찰의 성격상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성벽인 관문성과 가까이 위치해 있다.
원원사는 금광사,사천왕사와 함께 신라의 밀교의 중심지가 되는 사찰이였고, 현재 탑에 남아있는 3층 석탑의 조각 수준을 보아서 그때 당시 상당히 이름있는 사찰로 추측된다.
원원사가 지어진 시기와 폐사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지어진 시기는 신라가 통일된 직후인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 뒤 원원사가 폐사되었지만,
17세기 중반 다시 중건되었고, 18세기 후반에 원원사 스님이 활동한 기록이 있어,
이를 근거로 18세기에 까지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폐사 되었고, 지금은 공허한 터와 3층 석탑만 남아있다.
원원사지 동.서 3층 석탑
원원사지 3층 석탑은 원원사가 건립된지 얼마 되지않은 8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원사가 18세기때 폐사되었고, 이 자리에는 3층 석탑 두 기만 남게 되었다.
1809년에 일반인이 이 자리를 무덤으로 쓰기 위해 탑을 파괴하였고, 그 뒤 오랫동안 방치하다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학자 노세 우시조에 건의로 1931년,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원원사지 3층 석탑은 같은크기, 같은형식으로 건립되었지만, 파손으로 인해 현재 외형적인 차이가 있다.
높이는 7m이고 3층으로 구성되어있다.
원원사가 호국사찰의 목적으로 지어진거 처럼, 원원사지 3층 석탑 역시 호국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탑의 기단부 4면에 3체씩 12지상을 새겼고, 탑의 1층 몸돌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넣었다.
사천왕과 12지신은 불교의 대표적 상징으로 불법을 수호함과 동시에 신라를 수호하는 호국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3층 석탑의 오른쪽 탑
기단부에 3체의 십이지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12지상 조각은 김유신 장군묘, 원성왕릉과 같이 신라 유적들 곳곳에 조각되어있고,
1층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조각 되어있다.
12지상, 사천왕상을 조각한 이유는 불교의 힘을 빌려 신라를 수호하기 위함이였다.
3층 석탑 왼쪽의 탑
십이지상은 평복을 입고 연화대 위에 앉아 있는데 신선 처럼 고요한로 조각되어있다.
반대로 사천왕상은 강인한 이미지로 조각되어 두 상들이 대조를 이룬다.
십이지상,사천왕상 같은 조각을 석탑에다가 조각하는것은,
8세기에 시작되어 9세기 쯤 유행처럼 새기는데,
원원사지 3층석탑은 신라 석탑을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에 탑에 조각이 이루워졌다.
3층 석탑
왼쪽 석탑 오른편 부분
3층 석탑 왼쪽 탑
왼쪽 탑이 오른쪽 탑에 비해 파손이 심하다.
이는 원원사가 18세기 쯤에 폐사되고, 일반인이 이곳을 묘자리로 쓴다고 탑을 파손했기 때문이다.
원원사 금당터
현재는 터만 남은 원원사 금당터 이다.
금당은 사찰의 불상,보존불 같은것 모신 사찰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금당이 남아있었다면, 불국사 처럼 건물과 안의 불상까지 전부 보물 혹은 국보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지만
조선 후기에 원원사가 폐사되면서 전부 도난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