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잡담/일본 역사

1561년 오케하자마 전투 (오다 가문 3천 vs 이마가와 가문 3만)

상상력사전 2018. 12. 17. 00:05

 

지난이야기 

 

1551년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의 뒤를 이어 17세의 나이로 오와리의 다이묘가 된 오다 노부나가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오다 가문은 분가로서 격이 떨어졌고,

노부나가가 가문을 이었을때는 가문이 쇠퇴되어있었으며, 

노부나가 성향 자체가 혁신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이라 보수적인 지배층들의 불만을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오와리는 내분과 분열이 일어났지만,

8년뒤인 1559년, 노부나가는 오와리통일을 성공한다.

 

그러나

 

 

 

1561년

 

 

남쪽의  미카와, 도토우미, 스루가 3개국 지배자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북쪽의 다케다 가문, 동쪽의 호조가문과 삼국동맹을 맺고, 올인병력 3만을 이끌고 오와리를 침공한다.

당시 이마가와의 미카와,스루가,도토우미3국의 석고량은 60-70만으로

노부나가의 오와리 석고량 57만과 비슷하지만, 노부나가는 오와리를 통일한지 얼마 안되지 않았을 뿐더러

주위에 적들을 방위하는 병력을 빼면 동원병력할수있는 병력이 최대2,3천 밖에 되지않는다.

(석고1만= 대략250명 징병가능, 그런데 어떻게 이마가와 병력이 3만이냐면 올인병력으로 싹싹긁어모아서 공격한 상황이여서 가능)

 

 

 

각 가문 전투 전 전략

 

오다 가문

오와리를 막 통일한 상황이고, 주위에 적들을 방위병력도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이마가와 3만명에 맞서서 싸울 최대 동원 병령은 3천명이였다. 동맹가문은 하나도 없으며, 주위에는 적가문으로 둘러쌓인 상황,

항복이 이상하지 않은 이 상황에서 오다노부나가가 선택한 전략은 무사답게 죽는것이였다.

실제로 특별한 전략회의를 하지 않았고, 가신들하고 잡담했다고 한다. 사실상 자포자기 한것이 아닐까?

그리고 요새들이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에 나가기전 아츠모리라는 일본 춤을 춘뒤 전투에 나간다.

무사로서 검에살고 검에 죽기위해....

 

이마가와 가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전략은 정석적인 물량전이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때부터 싸워온 요시모토는

손자병법의 "싸우기도 전에 이겨놓아라" 라는 말을 지켰고, 그는 전투에서 싸우기도 전에 이겼다.

적인 노부나가는 이제 막 오와리를 통일했고 주변에 적으로 둘러쌓여있어, 병력이 고작  3천인데 반해,

이마가와 가문은 주변에는 동맹군으로 둘러쌓여있고, 올인병력으로 3만병이다.

양 가문의 병력차이가 10배차이 나는 이 싸움은 사실상 전투하기전에도 사실상 끝난것이다.

 

 

 

 

전투 전개

 

 

1561년 6월 5일.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선봉을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후에 도쿠가와 이에아스)로 하고 약 3만의 대군을 끌고 오와리를 침공한다.

 

 

 

6월 12일 이마가와 군은 오다군의 마루네 성과 나루미성을 포위했다.  그동안 노부나가는 특별한 전략회의도 안하고 잡담하다가 성의 포위소식을 듣고 노부나가는 아츠모리(일본 가면 공연)를 추고 출정 준비를 했다.

 

6월 13일 새벽 3시. 이마가와군은 두 성을 일제히 공격했다. 4시에  오다 노부나가는 약 병력 3천을 이끌고 출정했지만, 오전 11시 결국 두 요새가 함락 되었다.  한시간뒤인 12시에 남쪽에 이마가와의 군량수송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를 올릴겸 기습하기로 한다. 그 이마가와의 군량수송대를 치려고 했을때 주위에서 폭풍이 불었으며, 게다가 군량수송대라고 생각했던 부대는 사실 이마가와 본대 5천로 계속되는 연전연승으로 그늘에서 잠시 쉬고있던 도중이였다. 그야 말로 천운이라고 밖에 할수없다.

 

중세시대 전쟁에서 확실하게 승리할수 있는방법은 바로 사령관 모가지를 날리는 것이다. 특히 그 사령관의 계급이 높으면 높으수록 효과는 더욱 확실하다. 사령관 모가지를 날라간다는 의미는 군대 전체의 지휘체계의 붕괴로 인한 소멸을 뜻하는데, 특히 중세시대라면 더더욱..........

실제로 유명한 명장들의 유명한 전투가 이런경우가 있는데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 알렉산더대왕의 이소스 전투, 

또 가상의 전투인데 은하영웅전설의 버밀리온 회전이 있다.

 

 

앞서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본대를 공격할때까지 오로지 수송대로 착각하고 있었고,

또한 이마가와 본대는 계속되는 승전으로 그늘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전략도 없고 그냥 무작정 돌진하는것으로 사실상 무사답게 죽으려 하는것이였는데, 

이는 즉 완전한 천운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모든것을 준비했지만, 그놈의 운이 없어서 죽었다. 이로인해 전투의 승패가 완전히 뒤집혔다. 이마가와 본대는 이마가와가 죽은 즉시 대혼란, 그뒤 모든 부대에 전파되어서 이때부터는 오다 가문의 살육전으로 바뀌였다. 하지만 이래도 너무나도 많은 이마가와 병사로 인해 오다노부나가는 적당히 때에 휴전 한다.

오케하자마 전투가 일어난 아이치현 도요아케시. 지금은 오케하자마 옛전쟁전설지라고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전투결과 

  • 이마가와 가문의 천하통일 좌절,전투에서 승리했으면 석고 100만석 확보로 전국최강세력으로 자리잡았고 일본통일은 노부나가가 아니고 이마가와가 했으며 지금쯤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것이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독립,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여전히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으로서 활약하고 있을것이다. 반란? 이마가와 가문이 전국최강인데, 반란하는것보다 마누라가 이마가와 딸이여서 신분적으로 대접도 받아, 꿀리지 않은 대접받는데 굳이 반란하는거보다 이마가와 가문에서 한자리 차지하는게 나을껄?
  •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통일에 밑거름이 됨, 왜냐하면 오와리 1국이 석고 56만이 미카와,도토우미,스루기 3국의 석고 대략 70만에 맞먹은 알짜배기 땅이여서 그가 오와리에서 제대로 출발하는데 기틀을 마련해줌

오다가문

오다 가문은 오케하자마에서 이긴 즉시 병사를 보내 쿠츠카게성을 빼앗고 나루미성은 이마가와의 수급을 주는 협상을 통해 얻게 된다. 이로서 오와리의 이마가와 가문의 점령지역을 완전히 되찾았고, 오와리 전역을 통일했으며 남쪽으로는 이마가와에 반기를 들고 독립한 소꿉친구 마츠다이라 모토야스(후에 도쿠가와 이에아스)와 동맹을 맺고 오와리의 병력을 모와서 미노 침략에 전념할 수 있게 되며, 이후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된다.

 

오다 가문 주요인물의 뒷 이야기

오다 노부나가- 오케하자마 전투승리후 세력을 확대해서 천하통일을 사실상 눈앞에 두고 부하인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혼노지에서 죽게된다.

모리 신스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벤 그는 노부나가의 정예부대에 소속되었으며, 노부나가의 호위로서 활약하게되지만, 노부나가와 함께 혼노지에서 죽게된다.

키노시타 히데요시-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신으로 인한 퇴각전에서의 활약, 아자이 가문가의 전쟁에서 활약으로  오우미의 다이묘가 되고 나가시마 전투, 데토리가와 전투등 유명 전투에 참여한다. 그리고 주고쿠 전선 사령관에 임명되어 모리가문가 싸우던 도중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다른 오다가문의 장수들과의 전쟁에서 최종승리자가 되어 오다가문 전체를 차지하게 되고 천하를 통일한다.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개명한다.

 

 

 

이마가와 가문

이마가와 가문의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주요 중신들을 잃었다. 요시모토의 뒤를 이어서 아들인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다이묘자리에 올랐는데, 그는 아버지는 내정에 중시했으며, 전투에서 크게 패했지만, 국력은 오다 가문보다 여전히 강했다. 

 

 

이마가와 가문의 주요인물 뒷 이야기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망

이마가와 우지자네- 아버지 요시모토를 뒤이은 다이묘. 그러나 아버지보다 무능했고,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와 대립하다가 도토우미를 마츠다이라에게 잃고 동맹인 다케다 신겐의 배신으로 스루가마저 잃게되어 이마가와가는  멸망된다. 그 후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에게 몸을 의탁하며 가문을 지속시킨다. 축구를 잘해서 한번씩 이에아스한테 축구놀이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아스)- 선봉으로 나갔던 마츠다이라 모토야스(훗날에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미카와 지역에서 반자립하면서 오다가문과 대립했는데, 모토야스는 그렇게 간 보다가 몇 개월뒤에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복수를 하지않는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완전히 이마가와 가문으로 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오다가문과 동맹맺고 이마가와와 대립한다. 훗날 전국시대를 끝내고 에도막부를 연다.

 

 

오케하자마 전투 그 외 이야기

 

오다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공격할때 정면공격을 했는가? 우회공격을 했는가? 에 대해 논란이 많다. 과거에는 우회공격설이 대세였지만, 연구가 계속 진행되면서 정면공격설이 대세가 되고 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능력에 대해서도 예전에는 무능의 대명사였지만, 최근 연구가 계속 진행되면서 그는 무능하지 않았다는것이 밝혀지고 있다. 단지 운이 너무나도 없었을뿐.  일본 전국시대게임 신장의 야망에서는 이런것을 반영하는지 요시모토 일러스트가 초반에는 전형적인 무능 아저씨에서 잘생긴 아저씨로 변화 하고 있다.

                                                                                        

                                                                                   

 

 

 

 

재평가 받고 환골탈퇴된 최근의 이미지

 

오케하자마 전투는 일본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이긴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을 일보 직전까지 만들고 ,이마가와가문에서 독립한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나중에 전국시대를 종결시킨 인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 침공한 목적은 과거에는 수도 교토로 가서 정권을 잡으려는 상락이었고 오와리 침공은 어디까지나 가는 길 도중이었다고 생각했는데, 현재 연구결과 오와리 병합이 목적인것이 가능성이 높아진걸로 밝혀졌다.

 

 

왜 과거하고 현재하고 연구결과가 상반되게 틀리나면, 전국시대 이야기 자체가 허구가 많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이야기들은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막부시기에 실직한 사무라이들이 권위를 상승시키기 위해 조상들의 이야기를 판타지스럽게 꾸몄고 그것들이 현대까지 내려와 자본주의 시장과 혼합하여 더욱 확산 되었기 때문이다. 

 

 

 

 

외전 이마가와 가문 이야기

이마가와 가문은 원래부터 명문 중에 명문가문이였다. 1519년 스루가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아버지인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자상속과 골육상잔이 일상인 전국시대에서 아들이 많다는것은 그만큼 내분의 요소가 많다는것, 그는 4살때부터 불교에 입적하여 세상과 떨어지지만, 1536년 17살때  장남과 차남이 죽어 이마가와가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골육상잔인 하나쿠라의 난에서 승리하여 스루가의 다이묘자리에 오르고 이때 이름을 요시모토로 개명한다. 

1537년  북쪽의 다케다 가문과 결혼동맹을 맺었기에 동쪽 호조가문과 다투게 되었고 전투가 펼쳐지는데 이때 패배했고 가토 지역을 뺏긴다.

1541년 호조가문 다이묘인 호조 우지야스가 죽자 이를 계기로 우에스기 가문과 연합해서 공격한다. 그래서 다케다 가문이 정전을 중개 했는데, 정전의 대가로 빼앗긴 가토 지역을 다시 되찾는다.

1542년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가문을 공격하자, 미카와 마츠다이라 가문과 연합하여  오카자키 성 근처에서 전투를 펼치지만(1차 아즈키자카 전투) 패배한다.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다이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 도쿠가와 이에아스의 아버지)가 오다 노부히데의 지속적인 압박에 버티지 못하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했고, 아들인 마츠다이라 다케치요( 훗날 도쿠가와 이에아스)를 인질로 보내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오다 노부히데에게 보내진다.( 이때 노부히데의 아들 노부나가와 인질인 다케치요는 인연을 가진다.)

1548년 오다 노부히데가 다시 미카와를 침공하지만, 이때 이마가와는 대승을 거둔다(2차 아즈키자카 전투)

1549년 마츠다이라 히로타다가 부하에 암살당한다. 이를 계기로 마츠다이라의 미카와 지역을 지배하에 둔다.

1551년 오와리의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가 죽고 아들인 오다 노부나가가 다이묘에 올랐고 오와리는 분열되었다.

1554년 동쪽의 호조가문과 결혼동맹을 한다. 그리고 다케다 호조 양 가문을 결혼동맹을 체결시켜서 3국동맹을 완성시킨다. 북쪽은 동맹 다케다, 동쪽은 동맹 호조, 남쪽은 바다,  이로서 모든병력을 오와리로 집중시킬수 있게 되었다. 이때가 이마가와 가문의 최전성기 였다.

 

1560년 드디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와리를 침공한다. 그리고 거기서 끝났다.

(침공전 이마가와 영토. 왼쪽부터 미카와,도토우미,스루가 3국을 제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