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울산 방어진항 근대 유적지

상상력사전 2020. 3. 4. 16:45

울산 방어진 근대화의 흔적 방어진 골목 유적지

 

울산 방어진은 1890년대만 해도 농어민 30가구만 엄청 작은 어촌이였다.

 

그러나 1900년대가 될 쯤, 일본 오카야마현의 히나세 마을 어부가 태풍으로 인해 우연히 방어진에 정박,

방어진이 어족자원이 풍부한 것을 발견하고 하나 둘 넘어오게 된것이 방어진의 근대화의 시작이고, 울산의 근대화의 시작이 된다.

 

일본인들이 하나 둘 넘어오기 시작하자 방어진은 동해안 항구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1920년대에 일본인 3천명이 살게되고, 연간 약 1만명의 어부가 다녀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방어진은 근대적 도시로 발달하는데 울산 최초로 전기와 목욕탕, 극장이 생겼다고 한다.

1928년에 울산 최초로 근대적 방파제가 완성되었으며,

1929년에는 우리나라 근대 조선사업의 시작인 방어진철공조선가 설립된다.

이는 울산이 세계적인 조선사업도시로 거듭나는 씨앗이 된다.

얼마나 도시가 발달했는지, 방어진의 일본 갑부(나카베 이쿠지로)는 아예 방어진까지 이어지는 철도까지 만들 계획을 하고 로비까지 했다.

 

그 뒤 광복이 되자 히나세 사람들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게되었다.

즉 이 사람들이 남긴 유적이 바로 방어진 골목 유적들이다.

 

(본문과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조선사람들은? 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는데 당연히 일본 근대화 발전에 필요한 인적자원으로 소모되었겠지.)

 

 

 

당시 방어진의 근대 유적을 남기고 간 일본인들. 

방어진에 일본인이 살던시기는 약 50년. 이들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살다가 광복이 되자 쫒겨났다.

하지만 원래 자기 고향이 실은 남의 땅을 강탈했다는 장소였다는걸 깨달았을때, 그들의 마음은 혼란 스러웠을거다.

현재 이들과 이들의 후손은 아직도 교류하고 있다고 한다.

 

 

 

 

 

방어진에서 물고기 팔아 일본 갑부로 성장한 나카베 이쿠지로. 

일제강점기 당시 방어진에서 제일 영향력있는 사람이라, 그의 공덕비 까지 따로 만들어 졌다.

 

 

 

 

나카베 이쿠지로의 공덕비.

당연하지만 광부후 박살나고 남은 흔적.

 

 

 

나카베 이쿠지로가 재벌이 되게 만든 배. 제일신세이마루

나카베 이쿠지로는 발상을 전환하여 배에다가 모터를 달은 배를 만들었다. 

이러니 다른 배들이 경쟁이 되겠어? ㅋㅋ

그래서 남들이 10 잡을때 혼자 100잡고, 이렇게 나케베는 재벌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방어진 근대화 시기의 지도

 

 

 

 

 

 

 

 

 

 

 

방어진 골목 유적지

 

 

 

 방어진 방파제 축조비

일제강점기 시절, 울산 최초로 근대적 방파제를 세운 기념으로 세운 방파제 축조 기념비다.

 

1910년대 부터 일본인 거주민이 많아지자 배를 보호하기 위해 방파제를 축조한것을, 1920대에 들어서 사람들이 더 많아지자, 대규모 공사 방파제 공사를 축조했고, 이를 기념한 비석이 현재의 방파제 축조 기념비이다.

 

원래 방파제 입구에 세워진 것을 2000년도에 방파제 복원공사를 추진하면서 옮기고 2019년도에 또 복원공사 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높이 2m40cm, 두께 90cm의 겁나 큰 이 비석은 정면 앞쪽이 조금 깨진것을 제외하고 양호한 근대 유적이다.

 

비석 왼쪽편은 공사개요와 이를 주도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정면은 방파제 축조 기념비 8자가 한자로 적혀 있으며, 오른편은 공사를 시작하게 된 이유와 추진 과정이 적혀있다.

공사하게 된 이유를 대충 요약하면 "방어진은 겁나 좋은 항구인데 파도가 쎄서 배를 보호하기 위해 방파제가 필요하서 설립함 ㅇㅇ" 이라는 내용이다.

 

이 공사는 1923년 3월 부터 1927년 8월 까지 4년 5개월이 결렸으며, 공사에 참여한 연인원만 약 20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국가 토목사업이였다.

 

이 공사에 쓰인 비용은 현재 화폐가치로 63억인데, 이는 인건비가 싼 조선인은 굴렸다는 소리이다.

또한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축조하고 있던 1925년 태풍으로 40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 근대적 비석은 방어진의 근대적 발전과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는 역사적 유적이라는 것과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 그리고 일본인 이주민들의 흔적을 동시에 살펴 볼수 있는 유적이다.

 

 

 

 

 

축조 당시 방어진 방파제 비석.

 

 

 

 

방파제에 설립된 등대.

 

 

 

방파제 축조비 오른쪽 편 

 

 

 

 

 

 

2. 방어진 철공조선터

방어진 철공소가 있었던 장소이다.

방어진 철공소는 방어진에 어선들이 많아지고 수리가 필요해지자 태어났는데 ,처음 만들어질 당시 목선 수리, 제작으로 출발했지만, 점차 철선 수리,제작으로 발달되었다.

그리고 광복후, 청구조선으로 사명을 변경었고, 최종적으로 세광중공업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지만,

2000대에 중소 중공업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부도나고 이제는 흔적만 남았다.

 

방어진 철공조선 터는 방어진의 근대화 성장과 함께 온 곳이지만, 이제는 그 흔적만 남아있다.

 

 

 

 

 

 

 

천년소나무

수명 1000년 추정의 용나무.

일제강점기 시절 신사가 세워졌다. 역시나 광복후 신사는 박살나고 용왕사라는 절이 세워졌다.

 

 

 

 

 

 

 

 

 

 

 

울산 최초 목욕탕

이 곳은 당시 히나세 거리라고 칭해지는 일본인 거주지에 존재하는 목욕탕이다.

당시 목욕탕은 이곳을 포함해 4개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이곳 하나만 남았다.

 

 

 

 

 

 

히나세 거리

 

당시 일본인 정착인들의 일본인 거주지, 즉 적산가옥의 흔적들을

당시 방어진에 정착했던 히나세마을 사람들의 고향을 따서 히나세 거리라고 칭했다.

 

근데 이게 다 여서 뭐 설명할거도 없네.

진짜 설마 여긴가 해서 2시간 헤메였는데 진짜 여기가 히나세 거리였음 .ㅡㅡ

재생사업으로 20억 들였다며... 2020년까지 라며.... 그렇다면 진짜 이게 다인데............................

 

 

 

과거  히나세 거리

 

 

 

방어진 활어센터

방어진의 중심지. 당시에 울산 근대화의 중심지 였지만, 이제는 그 흔적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