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잡담/일본 역사

1570년 6월 28일, 노부나가의 복수전, 아네가와 전투

상상력사전 2020. 11. 10. 17:01

 

 

배경

 

 

 

1551년(임진왜란 41년 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8세 젊은 나이에 오와리 국의 다이묘 자리에 오른 오다 노부나가,

그러나 당시 그는 파격적인 행동을 하는 희대의 기행자로 많은 사람의 반감을 샀고 

오다 가문은 분열된다.

 

그러나 그의 천부적인 능력으로 다시 가문을 재통일 시키고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아버지때 부터 내려오던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한다.

그리고 윗쪽 지역인 미노 지방을 접수하던 어느 날,

 

에이로쿠의 변으로 수도 교토에서 쫓겨난 쇼군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상경 요청을 받들고

1568년, 상경 전을 시작하여 3개월 만에 수도 교토를 점령하고 상경에 성공, 그 후 그를 쇼군으로 추대한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그가 무로마치 막부 마지막 15대 쇼군이다.

 

 

 

 

 

이 상경 전으로 인해 노부나가는 가족 상속 당시 오와리 1국의 다이묘에서( 그것도 분열ㅋ)

 

 

 오와리 국, 미노 국, 기나이 국, 야마시로 국, 야마토 국, 카와치 국, 이즈마 국 셋츠 국, 이세 국 

8국을 지배하게 되어 일본 최강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1570년, 천하인이 된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옹립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왜냐하면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쇼군과의 대립에서 기선 제압하기 위해

우선 노부나가는 쇼군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제압하려 했는데,

 

 

 

 

쇼군의 정치적 지지자 중 가장 큰 세력인 에치젠 국, 와카사 국 2국의 지배자,

아사쿠라 가문의 다이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상경 요청(을 빙자한 항복 요청)

요구하나 요시카게는 거절하고 ,

이것을 빌미 삼아 요시카게를 제거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3만 명을 이끌고 출병한다.

 

 

 

 

 

 

노부나가는 수도 교토를 출발하여, 동맹 가문 아자이 가문 영토를 통과하여,

 

1.노치세야마성을 점령하여 와카사 국을 평정한 뒤,

2.가네가사키 성을 점령한다.

 

순식간에 진격하여 아사쿠라 가문의 영토를 하나 둘 점령하는 노부나가.

 

 

 

그러나 이때 노부나가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여진다.

 

 

 

 

 

바로 오다 가문의 동맹인 아자이 가문이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뒤통수치기 위해,

가네가사키성을 포위하러 온 것이다.

 

아자이 가문은 아사쿠라 가문과 오다 가문 두 가문 동시에 동맹을 맺은 상황이었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결국 아사쿠라 가문을 선택한 것이었다.

 

처음에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문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내로 있는 여동생 오이치의 재치로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문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노부나가는 기껏 가네가사키 성을 점령했지만, 포위 섬멸당할 위기에 쳐해 지자,

빨리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훗날 가네가사키 전투 혹은 가네가사키 퇴각전이라고 불리는 회전이 일어난다 

 

말이 전투지 사실상 목숨을 건 줄행랑이었다.

매복이 있을지 모르는 골짜기를 확인도 못하고 지나가야 했고,

보급이 끊겼으니 각자 흩어져서 퇴각했다.

 

 

 

이런 위기에서 기노시타 히데요시(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개명)가 후미를 자청하고

활약하여 노부나가는 위기에서 벗어난다.

 

 

 

 

위기에서 벗어난 노부나가는

훗날 회상하면서 가네가사키 전투가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아네가와 전투

 

가네가사키 전투가 끝나고 교토에서 본성인 기요스 성으로 돌아온 노부나가는

배신한 아자이 가문을 응징하기 위해

 

 

가네가사키 전투가 끝난 지 2개월 뒤인, 1570년 6월(임진왜란 22년 전)

아자이 가문 본성인 오다니 성으로 침공을 개시한다.

병력은 약 20,000- 30,000명.

 

하지만 아자이 가문과 싸운다는 것은 곧 아사쿠라 가문의 병력과 동시에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연합군에는 연합군으로 맞서기 위해,

노부나가는 남쪽에 위치한 동맹 다이묘,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개명)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는 노부나가의 원군 요청에 현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갈까 말까 상당히 고민하다가 원군 요청에 응했고, 이 때문에 상당히 늦게 도착하게 된다.

 

 

 

 

한때 노부나가의 매제였으나, 지금은 배신자인 아자이 가문의 다이묘, 아자이 나가마사,

그는 가네가사키 전투가 끝난 후, 곧 노부나가의 침공을 예상하고,

노부나가와의 국경선에다가 여러 개의 성채를 짓는 등 전쟁에 대비하려 했지만,

 

 

 

 

 

예상보다 빠른 노부나가의 침공으로 인해,

아자이 가문의 방어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방어 주요 거점인 카마하 성은

성주가 노부나가에게 배반하여 오다 가문의 영토로 흡수되었다.

 

더 이상 노부나가의 진공을 막는 방해물이 사라진 것이다.

 

이에 따라 순식간에 본성 오다니 성에 도달한다.

 

오다니 성에 도착한 노부나가.

 

그러나 아자이 가문 본성인 오다니 성은

험한 산에 위치해있는 천혜의 요새인데,

이미 성안의 아자이 가문의 병력이 방어 준비를 끝낸 상태여서

함락시키려면 상당한 출혈과 장기전을 각오해야 했다.

 

게다가 아자이 가문 동맹군인 아사쿠라 군과 전투까지 생각해야 하는 상황.

 

훗날 학자들이 추정하기로 당시 병력이

아자이 가문이 5000-10000명,

아사쿠라 가문이 8000-1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우선적으로 성안에 있는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을 유인하여 격파하기 위해

군대를 회군한다.

 

목표는 오다니 성 남쪽에 있는 요코하마 성.

 

 

 

오다니 성에서 남쪽에 위치한 요코야마성(요코산성)은 아네가와(아네강) 근처에 있는 성으로서,

산성 주위에는 평지이기에 노부나가가 전투하기에 유리한 장소였다.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을 끌어내기 위해 성을 포위하는 노부나가,

 

그리고 며칠 뒤 함락 위기에 처한 요코타 성의 성주는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아자이 나가마사로서 이 구원 요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아자이 가문의 멸망을 의미하기에

눈물을 머금고 천혜의 성을 나가서 아사쿠라 군과 함께 요코타 성을 구원하러 간다.

 

(아자이 가문은 일반적인 전국시대의 봉건 연합 영주 세력이었다.

예를 들면 왕권이 약한 고대국가, 유럽 중세 봉건 국가를 생각하면 된다.

침략 상황에서 원군 요청 거절-> 세력 이탈 가속화- > 멸망ㅋ)

 

 

 

 

 

1570년 6월 27일, 노부나가가 요코야마 성을 포위하고

슬슬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오다 가문의 동맹군으로 합류한다.

 

다음날, 새벽

그리고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이 요코야마 성을 구원하기 위해

아네가와 근처에 왔다는 소식을 듣은 노부나가는 맞설 준비를 한다.

 

 

 

1570년 6월 28일,  새벽 5시,

아네가와(아네강)을 사이에 두고 두 연합군이 전투를 벌인다.

전투 추정 병력은 오다, 마츠다이라 연합군 약 30,000-40,000명 vs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 13,000-20,000명으로 오다, 마츠다이라 연합군이 훨씬 많았다.

 

 

 

 

 

 

손자병법에 따르면

전투는 하기전에 승리해야 한다 라고 했던가?

 

노부나가는 

본래라면 천혜의 요새 오다니 성에서 피 터지게 공성전을 해야할 상황에서 

강을 끼고 평지에서 방어만 하면 되는 상황으로 바꾸었다.

 

거기에다가 병력은 상대보다 두배 이상,

아자이 나가마사가 어쩔 수 없이 공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부나가는 방어에 유리하게끔 자신의 병력 배치를 13단 횡대로 배치하였다.

 

 

 싸우기 전에 이미 전투에서 이긴것이다.

 

 

 

 

 

 

그렇게  아네가와 전투는 시작되었다.

 

 

아자이 군은 병력이 열세인데도 공격자 입장에서 전투해야 하는 엄청 불리한 상황.

 

 

그러나 전투의 행방은 신도 알수 없다고 했던가?

 

 

아자이 가문의 명장 이소노 가즈마사.

 

 

 

 

 

그의 분전으로 1번 째, 2번 째 오다 가문의 진이 무너진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3번 째, 4번 쨰, 5번 째까지 무너지자,

흐름이 이상하게 연쇄되었고

오다 가문의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 붕괴되기 시작해 통제 불능에 빠지면서

오다 가문의 명장 시바타 가츠이에, 이케다 츠네오키등 장수들의 진이 격파되기 시작된다.

 

 

 

 

 

 

 

결국 아자이 가문 이소노 가즈마사의 분전으로 인해

 

그야말로 오다 가문의 무장들은 스트라이크 당한 꼴이 되고 만다.

 

 

 

 

 오다 노부나가가 배치한 13개의 방진중 11개가 박살시키는데 성공한 이소노 가즈마사

 

 

 

이렇게 되자 오다 노부나가는 본진까지 위험에 빠지게 되고

노부나가는 결국 똥줄타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결국 아자이 가문의 공세종말점에 달하여 공격을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여기에 아사쿠라 가문의 소극적인 참여와

오다 가문 동맹군 마츠다이라 가문 장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우회공격으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는 아사쿠라 군대를 격파,

 

 

 

그 뒤 무방비 상태의 아자이 군 측면을 공격한다.

 

 

이로서 측면에 공격받은 아자이 군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아자이 가문은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하여 전투가 끝을 맺고,  요코야마성은 함락된다.

 

 

현재 아네가와 전투가 일어난 지역에 가면

치하라(血原, 핏빛 평원), 치가와(血川, 핏빛 강)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당시의 끔찍한 장면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뒷 이야기

 

 

이 전투로 인해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의 사상자가 약 600-800명,

오다,마츠다이라 연합군의 사상자가 약1800명- 2500명으로

 

아자이,아시쿠라 연합군이 병력도 적으면서,

약 3배 가까이 피해를 보았다.

현대전에서 병력의 사상자 30퍼를 전멸로 판정한다고 볼때 엄청난 피해인것이다.

 

특히 아자이 가문의 피해가 장난이 아닌데,

 

아자이 가문의 영토는 거의 반으로 줄어들고,

주요 중신들을 포함하여 많은 가신이 죽었다.

 

그렇지만 아자이 가문은,

오다니 성이 있는한 재기 할 수있는 여력은 충분했다.

 

 

 

그래서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문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당장 막아야 할 오다 가문 주위의 적이 많았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후퇴를 결정하고,

함락시킨 사와야마성을 히데요시에게 맡기고 아자이 가문 공략을 맡긴다.

 

 

 

아자이 나가마사,

그는 전투 이후 멸망해가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오다 포위망 동맹에 가입하여 오다 가문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같은 동맹군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트롤,

다케다 신겐의 어이없는 급사,

노부나가의 기가막힌 천운으로 인해,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오다니 성은 함락되고 본인도 죽게되며,

결국 노부나가에 의해 머리뼈 술잔이 되는 굴욕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반대로,

아자이 나가마사의 세 딸들은,

천하인이자 미남인 노부나가, 절세미녀이자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의 피를 이어서 인지,

무사히 목숨을 건지게 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인이 되어 여자입장에서 천하를 호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