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잡담/일본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대기 1- 차별받는 농민으로 태어난 남자

상상력사전 2020. 10. 29. 14:00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을 일으켜 멀쩡한 나라를 침략,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희대의 악인.

 

 

그러나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이,

전국시대를 통일했다는 것과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점을 빼면 잘 알지 못한다.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어떻게 통일했을까? 그리고 왜 임진왜란을 일으켰을까?

아니 근본적으로 히데요시라는 인물은 대체 누구인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관리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전황을 기록한 징비록을 쓴 이유가

반성하고 훗날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희대의 악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을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마음으로 알아보자.

 

 

 

 

 

비천한 농민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5년 전인 1537년, 

오와리 국( 현재 나고야) 아이치현 나카무라 마을의 가난한 농민 키노시타 야에몬과 어머니 나카 사이에서 태어난다.

아명(어릴 때의 이름)은 히요시마루라고 하지만 후대의 창작이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히데요시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전국시대의 농민의 삶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명언이 있다.

"농민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명언은 장차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되고,

현재 일본인들에게 존경받는 위인인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한 명언 아닌 명언이다.

존경받는 위인이라고 칭송받는 그 조차 농민을 저렇게 생각하는데 같은 시대의 다른 지배층들은 어떻까?

전국시대에 기본적으로 농민들은 지배층들에게 생산물품으로 여겨졌다.

즉 지배층에게 농민이란 단순한 물건이었고,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기본 세율 50 퍼- 80 퍼였고,

 

 

일본 사회 특성상 신분이 고정되어 있어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들, 손자까지,

영원히 농민의 굴레라는 쳇바퀴 안에서 지배층에게 뼛속까지 수탈당해야만 했다.

 

 

 

 

실제로, 얼마나 수탈이 심했는지 태어나자 이런 세상 속에서 살지 말라고,

부모가 자기 아기를 죽이는 마비키라는 풍습까지 있었으니 말 다했다.

 

 


이러한 전국시대에서 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히데요시.

 

 

 

 

당시 오와리는 일본 3대 평야인 노비 평야가 있어 쌀 생산에 축복받은 지역이지만,

오다 노부히데라는 무사가 하극상을 일으켜 혼란한 지역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 키노시타 야에몬이 죽고 어머니 나카는 몰락한 다인 치쿠아미와 재혼하게 된다.

 

 

 

새아버지 치쿠아미는 히데요시를 새롭게 탄생될 가정의 걸림돌이라 생각하여 학대했고,

히데요시도 그런 새아버지 치쿠아미를 싫어했다.

 

 

 

히데요시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8살이 되던 날, 새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지쳐서

고메이지라는 절에 스스로 가서 입적하려다가 곧 뛰쳐나왔고,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15살 때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죽은 친아버지 재산을 들고 세상을 방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새아버지와 다르게 히데요시 어머니 나카는 히데요시에게 상당한 모성과 사랑을 쏟아주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않은 히데요시는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효도한다.

 

훗날 히데요시가 출세하여 한 지방의 성의 주인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자기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었고,


일본 천하통일이 된 이후에는 어머니에게 오만 도코로라는 칭호를 내려주고 ,

최고 벼슬 중 하나인 정 1품을 수여한다.

히데요시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했는지 한 예로,

임진왜란 도중 온갖 잔인한 명령을 눈 깜짝 안 하면서 명령하던 히데요시지만,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충격으로 졸도해버린다.

 

 

 

 

이렇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히데요시는 취직할 나이가 되자, 

아명을 버리고 새롭게 이름을 스스로 바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 이름은 장차 그가 천하통일한 후 스스로 개명한 이름이었고,

청년일 당시 그는 아명인 히요시마루에서 키노시타 도키치로 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마가와 가문의 하인으로서의 히데요시

히데요시 나이 18살에, 그는 고향인 오와리 국을 떠나 남쪽에 있는 도토미 국으로 간다.

도토미 국은 당시 이마가와 가문의 영토였고,

히데요시는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미츠시타 유키츠나의 밑으로 들어가 하인이 되었다.


당시 이마가와 가문은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3국을 지배한 강대한 가문이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팔자를 고치기 위해 고향 오와리를 떠나 먼 이곳까지 왔지만, 

 

 

 

당시 히데요시는 비천한 출신으로 학문은 고사하고 실무담당 경험이 전무한 초짜,

그만 실수를 해버리고 쫓겨난다.

 

 

오다 가문의 이름 없는 머슴, 히데요시,

 

이마가와 가문에서 쫓겨난 히데요시는,

다시 고향 오와리 국으로 가서,

 

 

오와리 국을 지배하고 있는 오다 가문의 젊은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다.    

 

히데요시가 받은 직함은 고모노(小者),

고모노(小者)란 주인집에 살면서 허드레 일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머슴이었다.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 취직했을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아버지 오다 노부타다가 재수 없게 넘어져서 죽었기에,

이른 시기에 다이묘 자리에 오른 애송이였다.

 

게다가 오다 노부나가는 지금으로서도 이해불가능할 정도로 파격적인 인물이어서,

오와리의 멍청이라고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던 사나이였다.

 

결정적으로 아버지 제삿날에 아버지 영정에다가 향초를 던지고 가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용서 못할 짓이었고, 이로 인해 오와리 국은 분열되었다.

 

여기에 남쪽에 위치한 최강 가문 이마가와 가문의 침략이 머지않았기에,

 

오다 가문은 내일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가문이었고,

이런 가문에서 히데요시가 받은 직위는 고작 머슴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고작 머슴인데 불구하고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했고,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에 눈에 띄기 위해 엄청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이때의 유명한 일화로 주군 노부나가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

겨울날 노부나가의 짚신을 가슴 품어서 데웠다는 일화는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 창작된 이야기이지만 이 정도로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을 만큼 일하는 이름 없는 머슴 히데요시,

히데요시의 노력은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가 빛을 보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름 없는 머슴에서 파격적인 승진 하여,

오다 가문의 본성인 기요스 성의 수리 실무자, 주방 실무자를 담당했고,

여기에서도 큰 성과를 내며,

오다 노부나가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히데요시라는 길거리 천한 농민은 점점 오다 가문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고,

 

 

히데요시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는 분열된 오와리를 통일하고,

이마가와 가문의 3만 병력을 3천 병력으로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격파하는 데 성공하여 오다 가문을 멸망에서 구해낸다.

2018/12/17 - [역사잡담/일본 역사] - 1561년 오케하자마 전투 (오다 가문 3천 vs 이마가와 가문 3만)

 

1561년 오케하자마 전투 (오다 가문 3천 vs 이마가와 가문 3만)

지난이야기 1551년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의 뒤를 이어 17세의 나이로 오와리의 다이묘가 된 오다 노부나가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오다 가문은 분가로서 격이 떨어졌고, 노부나가가 가문을 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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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머슴 히데요시와 오와리의 멍청이 오다 노부나가,

둘은 그렇게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여 역사를 바꾸고 있었다.  

 

 

 

 

 

 

 조강지처 네네와의 결혼

 

1561년 음력 8월, 히데요시가 25살이 되던 해에 스기하라 사다토시의 딸 네네와 결혼하는데

당시에 드문 연애결혼이었다고 한다. 

웃기는 것은 통설이 맞다면 네네의 당시 나이는 14살.......

하지만 히데요시가 늦게 결혼한 거지, 그때 당시에는 다들 이때 결혼했을 나이였다. 

 

 

 

네네는 스기하라 가문의 여식이고, 히데요시는 길거리 농민 출신, 신분 차이가 있는 결혼이었고,

부모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혼에 성공한다.

 

이후 네네는 탁월한 안목과 정치적 능력으로 히데요시를 내조하여,

그를 천하인으로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인재 기반 없는 히데요시를 위해 어린 친척들을 손수 길러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키웠다.

 

네네에 대한 인물평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노부나가가 대놓고 히데요시한테는 과분한 여자라고 했을 정도로 비범했던 여성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네네를 두고 히데요시의 바람기는 유독 심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불륜 상대는 주로 신분이 높은 여성들,

이는 히데요시의 비천한 신분 콤플렉스 탓이었다.

 

 

히데요시의 바람기가 어찌나 심했는지,

네네가 아예 히데요시 주군 노부나가에게 편지를 써서 하소연한 적도 있었고,

 

 

이에 노부나가는 편지로,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당신은 더욱 아름다워졌더군. 히데요시가 당신에 대해 여러 가지로 불만을 표하고 있는 모양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저 대머리 생쥐(히데요시)가 당신 정도의 훌륭한 여성을 다른 데서 얻을 수 있을 리 없으니, 당신도 아내로서 당당히 행동하도록 하고, 질투 같은 건 하지 않도록. 이 편지는 히데요시에게도 보여주도록 해요.

 

라며 부하의 아내인데도 불구하고 격식을 갖춘 편지로 답해준다.

주군 노부나가 또한 히데요시의 심한 바람기를 알고 있었다 보다.

 

 

 

바람기 많은 히데요시,

그렇지만 역시 조강지처가 좋았던가? 길거리 시정잡배 히데요시이건, 일본의 1인자 히데요시이건,

히데요시는 언제나 네네의 남편이었다

 

히데요시가 원정으로 성을 비워 성주 대행이 필요할 때에 믿고 맡기는 사람이 언제나 네네였고,

 

천하 통일한 이후에 히데요시는 조강지처인 네네에게 가장 높은 벼슬 중 하나인 종 1위를 수여했고,

둘이 있을 때는 그냥 편하게 사투리 써가며 대화했고,

전국 다이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네가 히데요시에게 사투리 써가며 말싸움을 걸면,

히데요시도 그냥 편하게 사투리 쓰면서 말싸움에 응해주었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미노 국 공략 시기의 히데요시의 스노마타 성 전설의 진실

 

오와리 북쪽 지방 미노 국을 지배하는 가문은 사이토 가문이었다.

 

본래 사이토 가문의 다이묘 사이토 도산은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으로서

오다 가문과 사이토 가문은 결혼 동맹으로 맺어진 동맹 가문인데,

 

사이토 도산이 아들, 사이토 요시타츠에게 죽자 두 가문은 대립 상태로 들어간다.

 

1561년, 사이토 가문의 다이묘 사이토 요시타츠가 죽고,

그의 장자 사이토 다츠오키가 다이묘 자리에 오르자,

노부나가는 6년에 걸친 미노 국 공략에 들어간다.

 

 

 

노부나가의 미노 정벌 당시 히데요시의 활약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바로 하룻밤에 축성했다는 스노마타 성 이야기이다.

 

 

스노마타 성, 혹은 스노마타 일야성 이야기란

 

노부나가가 미노 국을 점령하기 위해 오와리 국과 미노 국 사이의 스노마타 지역에 성을 세우려고 했지만,

미노 국 사이토 가문의 군대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다.

이에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자신이 축성하겠다고 나섰고,

히데요시는 하치스카 고로쿠와 같은 호족들의 도움으로, 강 상류에서 성 자재를 보내고,

강 하류에서 조립해서 하룻밤에 성을 완성시켰고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는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이야기가 바로 스노마타 일야성 일화이다.

 

이 이야기도 에도시대 후대에 쓰인 회본태합기라는 소설책에서 처음 나온 이야기로 지어낸 이야기이다. 

 

 

 

 

농민인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1567년, 6년에 걸친 공략 끝에 미노 국을 점령한 오다 노부나가,

이는 단순히 2국의 다이묘가 아니라 오와리 국 석고 57만 +미노 국 석고 54만으로

100만 석을 가진 거대 다이묘로 성장했다는 것이고,

이는 보통 5국을 지배한 다이묘의 경제력과 맞먹는다.

 

석고 1개 은 쌀 1석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를 말하는데,

쌀 1석은 성인 1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 생산량으로서,

석고 1 만석당 병력 250명 정도를 징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적극적으로 개혁을 할 수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자본주의 형태의 경제체제를 도입하고, 다른 다이묘들과 다르게 중앙집권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이로서 다른 다이묘들 눈치 보지 않고 능력위주의 인재를 사용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무리 능력위주의 인재 등용을 하고 싶어도 경제력이 딸리면 군사력이 딸려지고,

결국 이해관계의 인재 등용이 되어, 농민 출신 히데요시가 제대로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나 혁신적인 생각을 가진 노부나가 +

오다 노부나가의 생각을 실현시켜 줄 있는 경제력 +

히데요시의 노력과 재능,

 

이 세 가지가 기가 막히게 히데요시에게 존재했었고,

 

결국 오다 노부나가의 신분 차별 없이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하는 다이묘였고,

오다 가문은 풍부한 경제력으로 아무런 눈치를 보지 않고 정책을 펼치는 강대한 가문이었다.

거기에다가 능력 있는 인재 히데요시,

 

이 세 가지 시너지를 일으켜 결국 히데요시는 천한 농민임에도 오다 가문에 출세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 온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이마가와 가문에 그대로 있었으면 뒷일을 생각해 볼 때 무조건 잡부 1로 죽었음)

 

 

(다른 가문이었으면 국물도 없었다.

진짜 예외적으로 다케다 신겐의 4 천왕이라 불리는 코사카 마사노부가 있는데, 이 사람도 히데요시처럼 농부 출신이지만, 특별 케이스였다. 왜냐하면 그는 신겐의 남성 애인으로, 능력+ 사랑의 힘 ㅡㅡ 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밀당 고수였는지 신겐이 마사노부한테 신에게 맹세하건대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사랑 고백하는 러브레터가 사료로 남아있음 ㅡㅡ) 

 

 

 

 

 

 

 

미노 국을 지배하던 사이토 가문이 멸망하고, 히데요시는 사이토 가문 항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이때 인연을 쌓은 인물이 히데요시의 참모로 유명하며,

금공명( 삼국지 제갈공명의 그 공명)이라는 별명을 가진 다케나카 한베에(다케나카 시계 나루)이다.

 

 

사이토 가문이 멸망한 후,

히데요시가 사이토 가문의 가신인 한베에를 등용하기 위해, 

삼국지의 나오는 유비처럼 삼고초려하였다.

 

이때 시계 나루는 히데요시의 재능을 파악하고,

노부나가의 가신이 아닌 히데요시의 직속가신이라 면 섬기겠다고 제안했고,

시계 나루는 히데요시의 직속가신이 된다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당연히 후대의 창작이고,

실제로는 오다 노부나가의 직속가신으로 등용되었으며,

요리키(파견 무장)로서 히데요시에게 파견되어 히데요시의 참모로 일했다.

 

 

이쯤에서 히데요시는 

키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에서 키노시타 히데요시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

 

 

 

미요시 가문의 다이묘, 미요시 나가요시.

 

 

그는 1553년, 일본의 최고 지도자 무로마치 막부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쫓아내고,

수도 교토를 점령하여 상경에 성공한다. 

 

그러나 몇 백 년 동안 일본을 지배하던 쇼군을 쫓아낸 대가는 너무나 컸다.

그래서 미요시 나가요시는 쫓아낸 쇼군을 다시 불러들이고,

그와 협력하여 나라를 다스린다.

 

그렇게 수도 교토를 지배하던 미요시 가문과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둘은 싸움과 협력을 반복하며 주도권 싸움을 반복했다.

 

 

 

그러나 몇 년뒤 미요시 나가요시가 병사하고 미요시 가문은 혼란에 빠진다.

 

 

 

이에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다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미요시 가문이 상황을 뒤집기 위한 한방을 준비하는데,

 

 

1565년, 미요시 가문은 쇼군의 처소로 침입,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암살한다.

이것이 훗날 에이로쿠의 변이라 불리는 쇼군 암살 사건이다. 

 

 

에이로쿠의 변을 피해, 쇼군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아사쿠라 가문으로 피난해 왔다가

다시 오다 가문으로 와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교토로의  상경을 요청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을 받들고, 1568년, 교토 상경 전에 들어간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상경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는 교토를 점령하고 있는 미요시 가문을 물리치고

두 번째로는 교토 사이에 있는 다이묘 세력 영토를 통과해야 했다.

 

 

 

 

첫 번째, 교토를 점령하고 있는 미요시 가문,

노부나가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요시 가문 다이묘 미요시 나가요시는 이미 죽고 없으며,

미요시 가문의 유력 장수들 죄다 단명했고,

미요시 가문은 당시 두 파벌로 나뉘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두 번째, 교토 사이에 있는 다이묘 세력,

교토로 상경하기 위해 교토 사이에 있는 다이묘 세력 영토를 지나가야 했다.

 

사이에 있는 다이묘 세력은 롯카쿠 가문, 키타바타케 가문.

하지만 이들은 군사력이 약한 약소 가문이었고,

노부나가는 상경하면서 겸사겸사 군사력으로 점령하기로 했다.

 

 

 

 

또한 노부나가는 상경하면서 군사력은 한 방향으로 집중하기 위해

 

오다가 문 동쪽에 붙어있는 다케다 가문의 다이묘 다케다 신겐과의 결혼 동맹,

 

남쪽으로 마츠다이라 가문(훗날 도쿠가와)의 다이묘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결혼 동맹,

 

북서쪽으로는 아자가 가문과 결혼 동맹을 했고

 

이로서 오다 가문의 모든 병력을 서쪽 방향인 교토 상경 전으로 쏟아부을 수 있었다.

 

 

히데요시 또한 노부나가의 상경 전에 참여하는데,

 

 

롯가쿠 가문 본성 공략전인 간논지성 전투 참여하여 활약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당시 아직까지 그는 하급 장교로서,

많고 많은 오다 가문의 이름 없는 무사 중에 한 명에 불과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노부나가는 1568년 음력 9월에 상경 전을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3개월 만에 수도 교토를 점령 하여 상경에 성공한다. 

거기다가 상경하면서 주변 국도 같은 점령하여

기나이 국, 야마시로 국, 야마토 국, 카와치 국, 이즈마 국 셋츠 국, 이세 국이 노부나가의 영토가 되었다.

 

노부나가가 천하포무를 선언한 지 3개월 만에 일본의 천하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교토를 점령하자마자 미요시 가문을 쫓아내고,

아시가카 요시아키를 무로마치 막부 15대 쇼군으로 옹립한다.

 

그가 바로 약 250년간 일본의 지배자로 존속해 온 무로마치 막부 마지막 쇼군이었다.

 

 

 

 

 

 

 

 

노부나가 인생 최대의 위기와 히데요시 인생 최대의 기회

 

 

 

일본 수도 교토에 입성한 오다 노부나가, 그 뒤 교토가 위치한 지역인 기나이 국 평정에 들어가는데,

 

 

그때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교토에서 행정업무를 맡고 있었다.

 

 

 

 

 

1570년, 천하인이 된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옹립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요시아키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노부나가와

그것을 용납 못하는 요시아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와의 정치적 싸움에서 기선제압하기 위해,

요시아키의 정치적 지지 세력인 에치젠 국 다이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쇼군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상경을 요청한다.

 

 

 

 

 

 

에치젠 국, 와카사 국 2국의 지배자,

아사쿠라 가문의 다이묘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노부나가의 속셈을 파악하고 당연히 거절한다.

 

 

 

이를 계기로 노부나가는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에치젠 침공을 침공하고 여기에 히데요시도 종군한다.

노부나가는 수도 교토를 출발하여, 동맹 가문 아자이 가문 영토를 통과하여,

 

1.노치세야마성을 점령하여 와카사 국을 평정한 뒤,

2.가네가사키 성을 점령한다.

 

순식간에 진격하여 아사쿠라 가문의 영토를 하나 둘 점령하는 노부나가.

 

 

 

그러나 이때 노부나가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여진다.

 

 

 

 

 

바로 오다 가문의 동맹인 아자이 가문이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뒤통수 치기 위해,

가네가사키성을 포위하러 온 것이다.

 

사실 이 배신에는 노부나가 잘못도 한 몫한다.

 

본래 아자이 가문, 아사쿠라 가문은 전통적으로 동맹 가문,

그래서 오다 노부나가와 아자이 가문과의 동맹 체결을 맺을 때 조건을 내밀었다.

 

바로 만일 오다 가문이 아사쿠라 가문을 공격할 시에 아자이 가문에게 통보해 줄 것,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약속을 어기고 쳐들어 갔다.

노부나가 생각에는 자신이 천하인이 되었고  새로 서열정리를 들어가야 되니 아자이 가문을 길들이기 위해 약속을 어긴 걸까?

 

아무튼 아자이 가문으로서는 아사쿠라 가문인가 오다 가문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오랜 고민 끝에 아자이 가문은 아사쿠라 가문을 선택했고, 곧 오다 노부나가를 포위에 나선다.

 

 

처음에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문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내로 있는 여동생 오이치의 재치로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문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노부나가는 기껏 가네가사키 성을 점령했지만, 포위 섬멸당할 위기에 쳐해 지자,

빨리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훗날 가네가사키 전투 혹은 가네가사키 퇴각전이라고 불리는 회전이 일어난다 

 

말이 전투지 사실상 목숨을 건 줄행랑이었다.

매복이 있을지 모르는 골짜기를 확인도 못하고 지나가야 했고,

보급이 끊겼으니 각자 흩어져서 퇴각했다.

 

 

이때 히데요시는 이 상황이 자신의 인생 최대의 기회라고 판단,

노부나가에게 자청하여 퇴각하는 군대의 지키기 위한 후발대를 자처한다.

 

퇴각하는 군대를 후발대로 자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에 가까운 임무,

 

하지만 천한 출신의 그는 도박을 하지 않으면  출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일까? 

 

앞으로 오지 않을 기회는 왔고

 

여기에 그는 목숨을 배팅했다.

 

 

거의 확실하게 죽겠지만, 살아남는다면 노부나가의 주목을 받으리라.

 

 

 

 

그리고 히데요시는 수일에 걸친 기만전술을 통해 살아남는 데 성공하고,

거기에다가 노부나가를 퇴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때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는지 노부나가가 교토로 도착했을 때 주위에 10명의 병사밖에 없었고,

 

 

 

노부나가가 훗날 회상하면서 가네가사키 전투가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 눈에 띄는 데 성공하고,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실제로 가네가사키 퇴각 전을 계기로,

히데요시는 지휘관으로서 노부나가의 주요한 전투마다 기용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