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잡담/일본 역사

도요도미 히데요시 일대기2- 히데요시의 입신양명

상상력사전 2020. 11. 13. 02:49

 

2020/10/29 - [역사잡담/일본 역사]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대기 1- 차별받는 농민으로 태어난 남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대기 1- 차별받는 농민으로 태어난 남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을 일으켜 멀쩡한 나라를 침략,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희대의 악인. 그러나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이, 전국시대를 통일했다는 것과 임진왜란을 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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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가사키 전투가 끝나고 교토에서 기후성으로 돌아온 노부나가는

배신한 아자이 가문을 응징하기 위해

 

 

가네가사키 전투가 끝난 지 2개월 뒤인, 1570년 6월(임진왜란 22년 전)

이번에는 아자이 가문을 침략한다.

병력은 약 20,000- 30,000명.

 

그러나 두 가문의 연합군과 혼자서 동시에 싸운다는 건,

노부나가 입장으로는 아직까지 힘든 상황.

 

그래서 노부나가는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

 

 

 

남쪽에 위치한 동맹 가문인 마츠다이라 가문의 다이묘,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개명)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이 침략 때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오다 가문의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종군시킨다.

가네가사키 전투의 활약을 지켜보고 그를 중용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결국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목숨 건 도박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다, 마츠다이라 연합군 vs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의 운명을 건 전쟁이 시작되었다.

 

 

2020/11/10 - [역사잡담/일본 역사] - 1570년 6월 28일, 노부나가의 복수전, 아네가와 전투

 

1570년 6월 28일, 노부나가의 복수전, 아네가와 전투

배경 1551년(임진왜란 41년 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8세 젊은 나이에 오와리 국의 다이묘 자리에 오른 오다 노부나가, 그러나 당시 그는 파격적인 행동을 하는 희대의 기행자로 많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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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아네가와 전투 한 줄 요약하면

 

초반에 아자이 가문이 열심히 싸워서  전투에게 이길수 있었을 지도 몰랐는데,

아자이 가문의 동맹군 아사쿠라 가문의 트롤, 

오다 가문 동맹군 마츠다이라 가문의 분전 때문에 병력 차이를 못 이기고,

결국 대패한다.

 

이로 인해 아자이 가문는 주요 중신들을 포함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 재기할 수 있는 여력은 충분했다.

 

 

 

그래서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문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당장 막아야 할 오다 가문 주위의 적이 많았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후퇴를 결정하고,

아네가와 전투가 끝나고 즉시 함락시킨 요코야마성을

히데요시에게 맡기고 그에게 아자이 가문 공략을 맡긴다.

 

 

 

 

 

 

 

 

 

 

요코야마성을 맡으며 아자이 가문 공략에 나서는 히데요시.

이때 그의 지략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아네가와 전투에서 오다 가문의 11개 방진을 박살 낸 아자이 가문 에이스 무장 이소노 가즈마사,

그는 당시 사와산성(사와야먀성)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사와야먀성은 고립되어 물자 보급이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이에 굳이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고 지략으로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소노 가즈마사,아자이 나가마사에게 동시에 중상모략을 쓰는데,

 

 

여기에 아자이 나가마사에 걸렸다.

그는 히데요시가 퍼트린 중상모략을 믿고 이소노 가즈마사가 배신했다고 판단,

이소노의 물자 보급 요청을 거절했고,

 

 

이로 인해 이소노는 쫄쫄 굶고 결국 어쩔 수 없이 항복하였고,

히데요시는 피 한 방울도 안 흘리고 사와산성을 손에 넣는다.

(이소노 가즈마사는 그 뒤 필요 없어져서 토사구팽 당함 ㅠㅠ)

 

 

이 일화는 왠만하면 거짓인 전국시대 일화 중에서 실화인 일화이다.

 

 

 

 

1차 오다 포위망 동맹

 

 

1571년,

노부나가와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이 둘은 한 때 같은 목표를 가진 정치적 동반자였지만,

이제는 제거해야 할 적이 되었고

 

결국 쇼군은 노부나가를 제거하기 위해,

노부나가 주변 다이묘들에게 노부나가 토벌령을 내린다.

 

 

 

이것이 훗날 1차 노부나가 포위망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천하의 노부나가도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물량공세에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위기에 부딪칠 때마다 조정에 압력을 넣어 화친을 맺었는데,

 

 

한 번은 숙적인 아사쿠라 요시카게 앞에서 넙죽 도게자하면서,

천하를 아사쿠라 가문에 넘기고 다시는 까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대굴욕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포위망 동맹과 싸우기를 반복한 노부나가,

 

 

 

1973년 다시 대위기를 당한다.

 

다케다 신겐이 포위망 동맹의 맹주를 자처하며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상락 전을 펼치며 동맹군 영토 마츠다이라 가문의 영도를 침공해 온 것이다.

 

 

2019/04/11 - [역사잡담/일본 역사] - 1573년, 미카타가와라전투- 도쿠가와,오다 가문 연합군 1만1천vs 다케다 가문 2만7천

 

1573년, 미카타가와라전투- 도쿠가와,오다 가문 연합군 1만1천vs 다케다 가문 2만7천

미카타가와라 전투는 1573년 1월에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과 다케다 가문과의 도토미(시즈오카) 지역에서 싸운 회전들을 가리킨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생 최대의 위기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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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하면

다케다 신겐이 상경을 목표로 침공을 시작했고,

마츠다이라 모토야스(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를 방어를 시도했지만,

영혼 관광당하여 실제로 바지에 똥 지리면서 대패하는 굴욕을 맞는다.

 

이에 노부나가, 마츠다이라 둘 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밤에 잠도 못 자며 설치며 걱정했는데,

갑자기 다케다 신겐이 지병으로 갑자기 급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천운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포위망 동맹과 노부나가 간의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고,

노부나가는 포위망 동맹의 다이묘들을 하나 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아사쿠라 가문의 멸망

 

 

1973년 7월 노부나가는 다시 아자이 가문을 침략하기 위해 3만의 병력을 출병시킨다.

 

이에 맞서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동맹 가문인 아자이 가문을 지키기 위해,

아사쿠라 군 2만 병력을 이끌고 방어 시도를 했지만,

오다 가문의 진격에 아자이 가문의 여러 성이 함락되자,

아사쿠라군의 사기가 하락되었고 ,

결국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철군을 결정, 본거지인 에치젠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를 간파한 노부나가는 철군하고 있는 아사쿠라 가문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였고 전투가 일어났는데,

이 전투를 훗날 도네사카 전투라고 부른다.

 

그러나 도네사카 전투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전투였고,

이 전투로 인해 아사쿠라 가문의 2만 병력이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도네사카 전투로 아사쿠라 군의 소멸을 확인한 오다 군은,

아사쿠라 가문 본거지인 이치조다니 성까지 진격하였다.

주요 병력이 소멸된 아사쿠라 가문은 오다 가문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스스로 배를 갈라 할복자살,

이로 인해 몇 백 년 내려온 명문 아사쿠라 가문은 멸문당한다.

즉 전투 한 번 말아먹어서 순식간에 멸망 한 것이다.

(어쩌피 망할거 였지만)

 

 

 

 

아자이 가문의 멸망.

 

 

 

아자이 가문의 본성 오다니 성,

 

난공불락 천혜의 요새로 오다 노부나가의 몇 차례의 걸친 침략에도 함락되지 않았지만,

결국 여기까지 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오다니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몇 년 전부터 단단히 준비하여,

오다니 성의 앞 토라고젠 산에 본진을 두고 요코야마성까지 이르는 요새를 쌓고,

말려 죽여버리는 포위전에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천혜의 요새여도 힘센 천하장사여도 배가 고프면 굶어 죽는 법.

 

1973년 9월,  아사쿠라 가문을 멸망시킨 오다 군은, 

그다음으로 아자이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다니 성을 총 공격하자, 

난공불락 오다니 성은 결국 함락 직전까지 간다.

 

이때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문의 다이묘이자,

자신의 매제인 아자이 나가마사를 살리기 위해,

항복하면 살려주는 것과 함께 덤으로 영토까지 준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하지만 아자이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의 몇 번의 걸친 제안에도 거절한다.

자결을 결심한다.

 

 

이 때 나가마사의 아내이자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도 남편과 함께 자결하려 했지만,

나가마사의 만류로 그만두었고,

결국 오이치는 자신의 세 딸들과 함께 성을 빠져나간다.

 

 

이때 오이치를 무사히 빠져나가게 하는 임무를 수행한 자가 바로 히데요시였다.

 

네네라는 똑똑한 조강지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천한 출신으로 인해 생긴 콤플렉스로 고귀한 귀족 여성들과 숱한 바람을 피웠던 히데요시.

 

당연하지만 자신의 존경하는 주군 노부나가의 여동생이자,

당대 최고의 미인에 노부나가에게 똑똑하다고 인증받은 오이치에게도 엄청난 매력을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으로 오이치는 히데요시를 벌레 새끼 취급하면서 혐오했다고 한다.

나중에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 히데요시가 오이치를 구하려고 하자,

오이치는 히데요시에게 구해지느니 그냥 자살해버렸다.

 

오이치가 자살하자, 히데요시는 오이치가 남긴 어린 세 딸을 자기가 대신 키우고,

그녀들이 성장하자 오이치와 제일 닮은 막내 요도도노와 결혼한다. 

 

그리고 요도도노가 낳은 늦둥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멀쩡한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반역혐의로 죽여버린다.

 

이정도면 히데요시의 오이치 진심 트루러브를 인정해 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것 때문에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지만.......

 

 

아무튼 오다니 성이 함락되자 자결하는 아자이 나가마사,

이로 인해 북 오미 국의 3대의 걸친 아자이 가문은 멸문당한다.

 

이렇게 아자이, 아사쿠라 가문을 멸망 시킨 노부나가는

배신자의 말로를 보여주기 위하여,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버지 아자이 히사마사의 해골을 옻칠과 금칠하고 희롱하며 술잔으로 썼고,

이 일화는 노부나가가 흉폭했다는 증거로 널리널리 쓰이게 된다.

 

이 황금 해골들은 현재 후쿠오카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나가하마 성의 성주 히데요시

 

 

아자이 가문, 아사쿠라 가문 두 가문을 멸망시키고, 

북 오미, 와카사, 에치젠 3국을 손에 넣은 오다 노부나가.

 

이 영토들로 하여금 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을 실시했는데,

 

이때 히데요시는,

아자이 가문과 전투에서 활약,

히데요시는 오이치를 무사히 빠져나가게 한 점과 함께 지금까지 활약한 것들을 보상받아,

아자이 가문의 영토였던 북 오미 지역 12만 석을 받는다.

 

(1석이 성인 1명이 1년 먹을 수 있는 쌀 생산량을 가진 영토를 뜻한다.

1만 석이면  대체로 200명-300명은 무리 없이 징집 가능할 수 있다고 보는데,

12만 석이면 3천 명에서 4천 명 정도 징집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천한 농민이었던 히데요시가 한 지방의 다이묘가 된 것이다.

 

우선 히데요시는 폐성이 된 오다니 성의 자재 이용해,

오다니 성 근처에다가 성을 쌓고

성 이름을 나가하마 성이라고 짓는다.

그리고 이곳을 히데요시 가문의 본성으로 삼는다.

 

 

천한 농민 출신에서 하루아침에 12만 석 성주로 파격 승진한 히데요시,

당연하지만 오다 주요 가신들은 저런 천한 놈하고 같은 한 자리라면서 불만이 많았고,

 

히데요시는 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당시 오다 가문의 넘버 1, 넘버 2 가신이었던,

시바타 가츠이에(柴田勝家)와 니와 나가히데(丹長秀) 성으로 부터 한 글자씩 따와,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만들고 자신의 성으로 삼는다.

 

즉 키노시타 히데요시에서 하시바 히데요시로 개명한 것이다.

 

 

 

 

그리고 나가하마 성이 다 만들어지고 히데요시가 제일 먼저 한 것은,

고향에 있는 어머니 오만도코로(나카)와 조강지처 코다이인(네네)를 성에 불러 살게 한 것.

 

 

 

 

 

히데요시의 아내 네네는 똑똑한 여성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히데요시도 자기 이런 아내를 믿고 멀리 원정 나갈 때마다 네네에게 성주 대행을 시켰다고 한다.

 

또한 네네는 농민 출신으로 인해 인적 기반이 전무한 히데요시를 위해,

어린 친척들을 자기 아들처럼 키워 히데요시 가문의 충성스러운 가신으로 키웠는데,

 

이때 네네가 키운 대표적인 인물이, 

 

시즈가타케 칠본창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 당시 2군 사령관으로 울산성 전투로 유명한 가토 기요마사.

 

시즈가타케 칠본창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 당시 5군 사령관으로 영천성 전투에 참여한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이 있다.

 

이렇게 네네에 손에 키워진 가신들은,

히데요시 가문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나가하마 성 성주일 당시 친인척 가신뿐 아니라 인재 발굴에 나섰다.

 

이때 발굴된 인재가,

 

행정관으로 천재인 이시다 미츠나리.

 

그는 히데요시와 첫 만남부터 "세 잔의 차"라는 일화를 있을 정도로 비범한 인물이었고,

실제로 행정분야에 있어 천재였다.

 

그러나 그에 비해 군재에 형편없었고,

오다와라 정벌 당시 오시성 전투에서 3만 명으로 고작 몇 백 명 병사한테 시간 끌리는 추태를 보였으며,

 

제일 하이라이트로 임진왜란으로,

s급 장수들과  정예 3만 병력을 가지고 3천 명 병력을 가진 권율한테  행주산성에서.

우주관광당하는 개굴욕을 당하는 추태를 보인다.

(행주대첩을 보면 알겠지만 지면 바보인 싸움임)

 

 

그의 형편없는 군재는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배하여,

도요토미 정권을 멸망시키는데 일조한다.

 

 

오오타니 요시츠쿠.

 

병으로 인해 얼굴이 두건으로 가려진 이미지로 유명한 장수로(실제로 가렸는지 모르겠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와 같은 엘리트 행정관료였고,

임진왜란 당시 보급품을 담당하는 중요직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히데요시는 지금까지 형편없었던 자신을 보필해준 피 다른 이복동생에게 보답해준다.

 

히데요시의 새아버지 치쿠아미에게서 태어난 피 다른 이복동생,

그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 머슴일때 부터 형에게 따라다니면서 일했고,

히데요시의 전략적 실수나 뒷처리는 그가 깔끔하게 대신하여 거의 분신이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이런 히데나가에게 히데요시는 보답으로 1만 2천 석을 나누어준다.

 

(새아버지 치쿠아미하고 사이 나쁜 히데요시지만 이복동생 히데나가하고는 사이가 좋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