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잡담/일본 역사

최강의 사나이, 우에스기 겐신의 영토가 에치고 국에 한정된 이유

상상력사전 2020. 11. 20. 00:07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최강의 다이묘, 우에스기 겐신

현대 일본인에게 무력 최강, 통솔 최강, 의리 최강으로 알려져 있는 우에스기 겐신.

 

 

겐신은 1530년 에치고 국의 슈고다이(지방관리)중 한 명인 나가오 다메카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겐신이 태어날 당시 다메카게에게는 이미 후계자로 내정된 첫째 나가오 하루카게가 있었다.

 

이 상황에서 태어난 둘째는 혼란스러운 에치고 국에서 내분의 씨앗이기에,

겐신은 태어날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쓸모없는 인간 판정받고 어린 시절부터 강제로 절에서 생활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나가오 가문으로 돌아와 형을 돕는 우에스기 겐신.

그러나 겐신의 무력과 카리스마는 상상이상으로 뛰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가신들의 지지에 힘입어 아 형 나가오 하루카게를 쫓아내고,

형 대신 가독을 이은 겐신. 

 

이후 그는 우에스기 가문을 전국 최강 반열로 만든다.

그의 통솔력과 무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독을 이은지 몇 년 후,

아버지가 평생을 다 바쳐도 통일 못한 에치고 국을 순식간에 통일하였다.

 

그 후 관동지방으로 진출하여,

고즈케, 무사시국을 점령하고 10만의 병사를 연합하여 사가미 국의 호조 가문과 전투하여 오다와라 성 공성전을 벌인다.

( 이겼으면 관동 점령인데 패배하고 무사시국, 고즈케국 성주들 죄다 배신 때려서 고즈케 지역 일부 영토만 얻음 )

 

그 후 시나노 국으로 진출하여 라이벌로 불리는 다케다 신겐과 5번의 대 전투를 벌인다.(가와나카지마 전투)

 

그의 통솔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뛰어난 전략가로 유명한 다케다 신겐은 겐신과 싸울 때 최대한 야전은 피했으며,

 

실제로 당시 일본 무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전국 최강은 다케다 아니면 우에스기로 생각했고,

역사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우에스기 겐신의 승률은 90퍼가 넘는다.

 

무력 또한 대단하여 반란 진압 때 검은 옷을 입고 앞서 나가 반란군 들을 섬멸했다는 일화는,

진짜 기록된 실화이다.

 

그래서 일본 전국시대 게임인 신장의 야망에서는 겐신의 통솔력을 최고치인 120으로 책정했고,

여기에 겐신만의 숨겨진 능력치가 더 추가되어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하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삼국지 14또한 겐신의 능력치를 100, 무력 91로 여포수준으로 주었다.

 

 

 

또한 겐신은 무력 최강인 데다가 의리의 화신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소금이 없어 위기에 빠진 다케다 신겐에게 적인데도 불구하고 소금을 보내주어 관용을 보여주었고,

적국이었던 호조 가문에서 위기가 빠지면 우에스기 겐신은 믿을만하니 그에게 도움을 청해라 라고 후계자에게 유언을 남긴 것은 유명하다.

 

 

무력최강,통솔최강, 의리최강,

여기에다가 일본 3대 평야가 있는 에치고 국을 지배하고 있어 부유함까지 갖춘 겐신.

 

이 정도 스펙이면 일본 전국 통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겐신의 영토는 에치고 국으로 한정되었고,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에치고의 용, 에치고 국에 갇혀 살다.

 

 

 

 

 

 

 

우에스기 겐신이 태어날 때 이름은 나가오 카게토라이다.

아버지 나가오 다메카게는 슈고다이 라는 지방 관리였는데,

한마디로 에치고 다이묘의 부하에 불과한 하급 관리였다. 

 

그러나 하극상을 일으켜 무력으로 스스로 다이묘 자리에 오른 다메카게,

당연하지만 에치고 지방 영주들은 다메카게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계속되는 반란이 일어난다.

 

이 뒤를 이은 우에스기 겐신도 당연하지만 반란이 수없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제압하기 바빴다.

얼마나 반란이 심했냐면 우에스기 겐신의 생애 대부분으로 한 것이 반란 진압이었으니 말 다했다.

 

 

이 때문에 겐신이 내세운 것이 바로 의리와 명분이었다.

그래서 관동지방에서 에치고로 도망친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양자로 들어가,

명문 우에스기 가문을 잇고 성을 나가오에서 우에스기로 바꾸어 관동지방 진출에 명분을 얻는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성공하면 대박이었던 관동지방 진출은 오다와라 공성전 패배로 실패했고,

대신 시나노 지역 진출로 방향을 바꾸지만 다케다 신겐과의 5번에 걸친 가와나카지마 전투로 인해 실패하여 에치고 외부로의 영토를 넓이는데 실패했다.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외교에 힘을 쏟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싸움이라고 평가했고 이 때문에 쓸데없는 싸움을 했다고 겐신을 깠다.)

 

결국 두번에 걸친 원정 실패는 겐신의 많은 병력과 물자를 소모 시켰다.

 

연이은 대규모 원정의 실패는 에치고 국의 반란에 활기를 불어 일으켰고,

결국 겐신은 반란을 진압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론적으로 외부 영토확장은 실패했고,

지배하고 있는 에치고 국은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났기에,

겐신은 일생 대부분을 반란진압으로 보내야 했고,

결국 우에스기 겐신의 생애 대부분의 영토는 에치고 국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겐신이 외부 영토 확장에 성공한 적이 딱 한번 있었다.  

 

 

 

 

우에스기 겐신의 마지막 원정

 

 

1570년대 후반, 에치고 국 반란들을 전부 제압하는데 성공한 우에스기 겐신,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겐신 자신은 늙고 병들었고, 이미 넘을 수 없는 벽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바로 오다 노부나가인데 겐신이 에치고를 통일할 무렵 오다 노부나가는 10대의 애송이 인데다가

오다 가문은 오와리 국 1곳만 지배하여 겐신에게 상대도 안되었다.

 

그러나 겐신이 에치고 국 반란 진압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이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시대 최강자에 올랐고 결국 뒤집기는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않은 겐신은 1577년, 쇼군의 상락요청을 받들고 2만의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출한다.

 

 

 

 

 

2만의 병력으로 엣추국의 진보 가문을 순식간에 멸문시켜 엣추 국을 점령했고,

노토 국의 하타케야마 가문, 본성인 나나오 성을

가신들의 내부 분열의 상황 속에서 모략을 써서 결국 점령에 성공하여 노토 국을 점령한다.

 

이때 겐신의 석고가 약 100만이었는데, 이때가 우에스기 가문의 최대 영토였다.

 

겐신의 상경에 대항하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는 나나오 성에서의 원군 요청을 받고 시바타 가츠이에를 대장으로 48,000명 구원군을 보낸다.

 

 

이 구원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포함되어있었는데,

평소 시바타와 사이가 좋지 않은 히데요시는 시바타와 의견 충돌이 발생하고 결국 무단이탈하는 일이 발생한다.

 

설상가상으로 오다 군이 데토리강 도하를 마치자마자 나나오성 함락 소식을 듣게 된 오다군은 철군하기 위해 강 도하를 하는데

철군 도중 우에스기 겐신이 이끄는 본군의 부대 20,000에 기습 추격을 받고 데토리가와 전투가 벌여졌다.

 

이때 오다 가문은 대 참패를 겪었으며 많은 익사자를 냈다고 한다.

전국 최강인 오다 가문이 우에스기 겐신에게 패하자 다시 오다 가문 곳곳에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2차 오다 포위망 동맹이다. 

 

전투에서 승리 후 오다 가문이 이 정도이면 상경은 문제 없겠다 판단하고 월동 준비를 위해 다시 에치고 본국으로 돌아간 겐신.

 

 

그러나 이것이 겐신의 마지막 전투였다.

에치고로 돌아와 겨울을 보내는 와중 갑작스럽게 다케다 신겐처럼 갑작스럽게 급사한다.

 

겐신이 죽은 장소는 화장실인데,

똥 싸기 위해 힘주다 뇌출혈로 죽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겐신은 채식주의자라서 육식을 하지 않았는데, 인간은 잡식 동물이어서 채식만 고집하면 기름 범벅인 인스턴트식품을 먹는 것도 몸에 더 안 좋다.

 

결국 채식고집으로 망친 늙은 몸으로 겨울철에 똥 싸기 위해 힘주다가 머리에 있는 혈관이 파열되었고 죽은 것이다.

비사문천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겐신의 어이없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겐신이 죽은 뒤 우에스기 가문은 내분이 일어나 두 파벌로 나뉘어 싸우게 되었고,

결국 자멸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