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잡담/일본 역사

일본 전국시대(센고쿠 시대)의 소개

상상력사전 2019. 4. 29. 00:41

 

일본 전국시대(센고쿠 시대)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하극상의 시대이다.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되며,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것이 당연한 지옥같은 세상.

남자로 태어나면 전쟁에서 싸워 죽는것을 미덕으로 세뇌당해 싸우다 죽으며,

여자로 태어나면 노동력 생산의 도구가 되어 인간취급이라도 받으면 다행인 취급을 받는다.

그런 세상 사람들은 살아남기위해 싸워 왔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태어났다.

그리고 일본인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시대 1위에 선정되었다.(ㅡㅡ)

 

전국시대의 구분은 학문적으로 전국시대의 시작은 오닌의 난(1467년)이고

끝은 무로마치 막부가 망하는 1573년이며,

그 뒤는 일본 근세의 시작인 아즈치,모모야마시대로 넘아간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가 망한뒤에도 진정한 난세는 끝나지 않았고 싸움은 끊이지 않았으니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통일을 사실상 확정한 시점에서 부하에게 살해 당하고

그 뒤를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천하 통일하지만

끝없은 야망이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실패했으며 그로 인해 죽고

세키가하라 전투로 도쿠가와 가문에게 천하가 장악당하고

오사카전투(1615년)로 천하는 도쿠가와 가문이 최종 승리자가 되며,

대규모 기독교 반란인 시마바라의 난이 종료된이후에 진정한 난세가 끝난다.

 

 

 

전국시대의 시작

 

14세기(1336년), 무로막치 막부는 새로운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약 130년뒤인 1467년에 일어난 오닌의 난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10년간 지속되는데,

이로 인해 전국은 황폐화 되었으며, 막부의 행정력은 수도 교토 주위에만 머물게 될정도로 약해진다.

정부의 공권력이 약해지니, 사회가 혼란해지고, 지방영주들은 중세유럽 영주처럼 자주적으로 

독립하고 살기위해 강한 영주에게 쌍무적 계약관계를 가져 연합맹주국 형태를 띄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렇게 전국시대는 시작되었다.

 

 

전국시대의 특징

 

농업생산력의 증가

각 영주들은 살아 남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상업을 진흥시키고, 병사 모집이 최우선 으로 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을 확대시키는데 주력해 이 시기의 농업생산력이 엄청 증가한다.

 

하극상의 시대

사무라이는 오늘날 이미지와 같이 충성을 위해 목숨을 마치는 무사도 정신을 가진 집단이 아니고, 상황때 마다 직장을 옮기는 샐러리맨 용병이였다. 그러니 주군이 약해지면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것이 이상하지 않는 세상이였다. 오로지 힘과 무력이 정의였기에.....

 

노예무역의 발달

나라가 혼란해지니 노예무역또한 발달되었는데 전국시대 말기에 규슈에서 네덜란드와 교역할때 조총,서양 물건등을 받는 대가로 성노리개용 일본노예를 그들에게 주는 인신매매교역을 했다.

주로 규슈의 기독교로 개종한 다이묘들이이런 인신매매 교역을 했는데 그들의 노예를 구하는 방법은 평민납치였다. 그렇게 팔려나간 일본여성만 50만명이상이 넘는다.

https://www.japantimes.co.jp/culture/2013/05/26/books/book-reviews/the-rarely-if-ever-told-story-of-japanese-sold-as-slaves-by-portuguese-traders/#.WE7weVWLSM8

 

성마을의 발달

전국시대 특성상 감시와 효율을 위해 성에서 다이묘,무사,농민 밀접하게 생활하는 성마을이 발달하게되었다.

 

왜곡과 미화가 많은 시대

애초에 다이묘및 사무라이라는 무장집단은 현대식으로 조직화하여 수탈하는 도적,야쿠자이며, 에도시기에 그들의 후손들이 미화, 왜곡을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와 2018년대에서야 재평가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 같은 경우나 아직까지 잘못 왜곡되어 있어 많은 재평가가 되고 있는 만큼 왜곡과 미화가 많은 시대이다. 애초부터 무사도 부터가 사기다.

 

다이묘는 왕이나 군주같은 힘이 없었다.

다이묘들은 통치할때 군주나 왕처럼 지배력이 없었다. 그들은 쌍무적 계약관계에 의한 지방호족들의 연합체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아 협의와 합의 없이는 운영이 어려웠으며, 결국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오다가문이 전국을 통일 앞장서게 된다.

 

 

평민들의 지옥같은 삶

 

전국시대 상류 지배자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명언 두가지가 있다.

 

"농민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말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어진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한 말이다.

 즉 농민이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죽을때까지 착취당해야 한다는 소리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어르신 같은 소리는 개잡소리였다. 

"백성이란 참깨와도 같다. 짜면 짤수록 기름이 나온다." - 전국시대 정치가

 

두 말로 보아 상류 지배자들의 생각으로 백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창출시키는 하나의 생산물품으로 생각했다. 그것도 짐승으로서 죽을 때까지 착취시킨다. 백성들은 다이묘끼리 전쟁중에는 왠만하면 피해입지않는다. 생산물품이니까.....

전세계적으로 살인적인 세율로 50-80퍼 이상을 세금으로 뜯겼다.

옆나라 우리 조선은 세율 10퍼로 임진왜란 당시 가토가 조선사람들 민심잡는다고 파격적으로 내린 세율이 40퍼니 일본 지배층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뻔히 보인다.

노예와 같은 삶속에서 일본 사회 특성상 신분이 고정되어있어서 죽을때까지, 그리고 영원히 아들도 그의 자손도 백성으로서 벗어날수 없었는데,태어나자 마자 아기를 죽이는 마비키라는 풍습이 생겨날 정도였다.

 

 

 

하지만 낭중지추,정말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주머니속을 뚫고 나온나고 하지 않았던가.

바로 키노시타 야에몬의 아들 키노시타 도키치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옥같은 전국시대를 끝내는 자가 일본 상류층도 아니고 하류층인 바로 그가 전국시대를 종결시킨다.

 

 

 

 

 

 

 

 

 

 

 

 

 

 

 

 

 

 

 

 

 

 

 

 

 

 

 

 

 

그리고 그 후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개명한다.

 

 

석고(石高) (고쿠다카)

사진출저 https://blog.naver.com/halmi

 

석고는 전국시대때 사용했던 토지의 생산 단위이다.

토지면적이 아닌 곡물 생산량으로 환산했으며,1석고는 쌀1석은 생산 할수는 토지를 말하는데

쌀1석이란, 1명의 성인이 1년간 먹을수 있는 쌀의 양을 말한다.

가문의 석고량이 가문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의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쌀100석당 병사 2-3병을 징병할수 있었고, 1만석당 거의 250명 징병할수 있었다.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후 태합검지를 통해 조사한 결과 전국 1850만석이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일본이 임진왜란당시 조선을 염탐해서 조사한 결과 조선은 1200만석의 석고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석고는 곡물의 생산량을 나타내기에 땅의 크기가 아니고 땅의 질이 중요 했고

실제로 노비(濃尾) 평야가 있는 오와리 1국 57만석이 면적이 몇 배 넓은 시나노국 41만석보다 많이 생산했다.

 

혼란의 끝 ,천하인들의 탄생

수 많은 분열 속에 서로 죽고 죽이는 난세도 시간이 흘러 갈수록 패자와 승자가 가려지고 결국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천하인이란 수도의 무로마치막부, 즉 아사카가 막부 손아귀에 넣어 천하를 지배한거나 다름없는 위업을 보여준 인물인데 난세 동안 5명이 나왔다.

 

 

 

 

1508년 오우치가문- 오우치 요시요키, 그는 백제의 후손으로, 1508년 군사를 이끌고 상락하여

쇼군을 옹립하고 중앙을 장악함으로서, 전국시대 최초의 천하인이되었다. 

 

 

 

1549년 미요시가문- 미요시 나가요시. 1549년막부를 토벌하고 미요시 정권을 세웠으며 5년간의 아시카가 정부와의 혈전끝의 화의로 정권을 안정화 시키고 10국의 패자가 된다. 전국시대의 왜곡상 최근에 재평가 되었는데 노부나가의 선구자라는 호칭을 받을 정도로 능력자였다.

 

 

 

 

 

 

1568년 오다가문- 오다노부나가. 미요시가문의 내부분열로 아시카가쇼군이 죽자 ,수도로 상경하여 세번째 천하인이 되었다. 중앙집권화를 완료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며, 사실상 전국통일 확정상태까지 갔다가 부하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최근 평가에 따르면 그렇게 파격적인 혁명가는 아니였다.

 

 

 

 

1584년- 하시바 가문 - 하시바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사후 다른 오다 장군들과의 내분에서 승리하고 도쿠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결국 노부나가가 못한 천하통일을 이루어 낸다. 후에 도요토미히데요시로 개명한다.

 

 

 

 

1600년 도쿠가와 가문 - 도쿠가와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의 뻘짓으로 죽고 난 후 세력 확대하고 세키가하라 전투로 친 도쿠가와 가문들을 싸그리 정리후 에도막부를 성립, 그 뒤 오사카 전투로 완전히 난세를 끝낸다

 

 

 

 

 

 

전국시기 주요 사건들이다. 블로그에 전부 연재할 생각이다.

 

1508년 오우치가문- 백제의 후손,전국시대 최초의 천하인이되다.


1541년 마츠다이라 가문과 미즈노 가문의 정략 결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탄생

1548년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첫 만남
1549년 미요시가문-막부토벌,두번째 천하인의 탄생. 노부나가의 선구자

1555년- 모리가문- 이츠쿠시마 전투

1551년  오다가문 - 오와리 통일

1560년 6월 오다가문- 오케하자마전투

1560년 마츠다이라가문- 이마가와로 부터 독립

1561년1567년 오다가문- 미노공략


1561년우에스기가문-  4차카와나카지마 전투

1565 미요시가문- 에이로쿠사변- 미요시가문의 내분


1568년 오다가문- 교토상경,세번째천하인이되다



1570년 1차 포위망( 오다vs 다케다 신겐 맹주의 전국다이묘동맹 )

1570년 4월 오다가문 - 가네가사키 퇴각전

1570년 7월 오다가문- 아네가와 전투
1570년 12월 오다가문- 대위기, 화친으로 위기를 모면하다


1571년 9월오다가문- 엔랴쿠지 소각

1573년 1월 다케다가문- 미타카가하라 전투


1573년 1차 포위망 동맹의 붕괴- 중세의 끝,전국시대종료, 근세의시작, 아즈치,모모야마시대의 시작



1575년 다케다 가문- 나가시노 전투

1576  2차 포위망 동맹 결성( 오다vs 우에스기 맹주의 전국다이묘 동맹)
1577년 우에스기 가문- 테토리가와 전투
겐신 사망
2차 포위망 동맹의 붕괴

1578년
2차 포위방 동맹 붕괴 이후 오다 가문


1578년 우에스기 가문- 오다테의난 가문계승문제로 둘로 찢어지다


1579년 도쿠가와가문- 이에야스의 비극 아들을 자기손으로 죽이다


1582년 3월 오다가문- 다케다 가문 정벌


1582년 6월오다가문- 혼노지의변, 몽환같은 꿈

1582년 - 아케치가문- 3일의 천하 야마자키 전투

1582년 7월 -오다 가문내분- 기요스 회의

1583년 - 오다가문의 내분 시즈가타케 전투

1584년- 도쿠가와 가문 -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1585 하시바가문-시코쿠 정벌
1587 하시바 가문-규슈 정벌

1589하시바가문- 관동정벌, 호조 정벌

1592년 5월 23일 조일전쟁 편

1598 12월   조일전쟁의 끝

1600년  도쿠가와 가문- 세키가와라 전투- 전투 전야

1600년 도쿠가와 가문 - 세키가와라 전투- 전투

1603년 에도막부 시작 - 아즈치,모모야마시대끝, 에도시대 시작

1614년 오사카 전투 - 전투전

1614도요토미 가문- 오사카 전투- 겨울의 진

1614 도요토미 가문- 오사카 전투 - 여름의 진

1637 시마바라의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