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잡담/일본 역사

1551년-1559년, 오다가문- 오와리국 통일

상상력사전 2019. 4. 25. 02:22

피도 눈물도 없는 전국 시대, 끝이 안 보이는 지옥속에서

 

1508년 백제인의 후손 오우치 가문이 막부를 장악하고 최초의 천하인이되면서 부터

흩어졌던 나라들은 슬슬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1534년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국의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오와리는 작은 땅이지만 일본의 3대 평야인 노비평야가 있어 생산되는 석고량이 57만석으로

오와리국보다 몇 배나 더 큰 옆동네 시나노는 석고량 41만석보다 훨씬 많이 나오는 기름진 땅이다.

 

 

석고는 전국시대때 사용했던 토지의 생산 단위이다.

토지면적이 아닌 곡물 생산량으로 환산했으며,1석고는 쌀1석은 생산 할수는 토지를 말하는데

쌀1석이란, 1명의 성인이 1년간 먹을수 있는 쌀의 양을 말한다.

가문의 석고량이 가문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의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쌀100석당 병사 2-3병을 징병할수 있었고, 1만석당 거의 250명 징병할수 있었다.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 오와리국의 기틀을 닦다.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는 단조노추 오다 가문으로 지위가 원래 말단중에 말단이였다.

 

 

원래 오와리의 슈고(지방 행정관)는 시바 가문이다.

그 시바 가문의 슈고다이(지방 행정관 대리)의 키요스 오다 가문 이고,

키요스 오다 가문의 가신 가문이 바로 단조노추 오다 가문으로

즉 덴노>쇼군(아시카가 가문)>>>>>>시바 가문>키요스 오다 가문>단조노추 오다 가문 으로

 

오다 노부히데는 속된말로 따까리의 따까리의 따까리, 즉 쌍노무시키였따.

 

하지만 시대는 전국시대, 실력있는 자가 세상을 차지하는 시대에서 지위란 그에게 쓸모 없었다.

 

1527년, 오다 노부히데는 자기 아버지로 부터 가독을 상속받고부터 주가 키요스 오다가문하고 싸우기 시작한다.

그뒤 남쪽 이마가와 세력과 전쟁하여 계속되는 승리로 이마가와의 오와리, 미카와 영역을 전부 차지하고, 수도 교토로 가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헌금하고 지위를 받으며, 주가인 키요스가문보다 지위나 세력으로나 압도하게 된다. 그뒤 북쪽 사이토 가문을 공격하고 선전하고 있던 찰나,

 

전성기는 거기까지 였다.

갑자기 넓어진 영토는 주변의 많은 적을 만들었고, 사이토 가문의 원군으로 온 북쪽의 아사쿠라 가문의 원정군에 패배한다. 그 뒤 연속되는 패배로 위축되고,

남쪽으로는 미즈노 가문(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머니 가문)이 마츠다이라 가문(도쿠가와 이에야스 아버지 가문)과 절연하고 오다가문으로 신종되는 계기로 마츠다이라 타케치요(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납치하고 마츠다이라 가문을 회유하지만 실패를 계기로 마츠다이라 가문을 침공하지만 이마저도 실패, 게다가 장남 오다 노부히로까지 인질로 잡히자 마츠다이라 타케치요와 인질교환한다.

그 뒤 마츠다이라 가문의 다이묘는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이마가와가문에게 종속당한다.

땅은 땅대로 잃고 적은 적대로 늘린되다가 이제는 주가하고도 싸울 처지에 놓이자, 아들 오다 노부나가와 북쪽 사이토 가문과 결혼동맹을 맺고 그 뒤 1551년 사망한다.

 

 

1551년 아버지 노부히데가 갑자기 사망하자, 그는 가독을 이어받았다.

원래 노부나가 위에 형이 2명이나 있지만, 첩의 자식이기 때문에 장자로 인정되지않았다.

아버지의 가독을 이어받았을 나이 17세였다.

 

 

 

분열된 오와리

1551년

노부나가를 기록한 신장공기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아버지 장례식에 모습을 들어내지 않았고, 그것도 끝날때쯤 장례식장에 왔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초상을 향해 향을 던졌다고 기록되어있다고 했다. 이것이 창작일 가능성은 적지만, 이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그는 혁신가이고 합리적인 사람으로서 당시 지도층, 소위 꼰대를 한테 많이 미움을 샀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더욱 오다가문 사이의 내부갈등이 더욱 커졌다고 한다.

아버지가 물려준 단조노추 오다 가문은 한때 오와리의 지배자였지만, 지금은 쇠퇴하고있는 가문이고

오다 노부히데 또한 죽어 언제 망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오다 본가 세력인 키요스 오다가문( 파랑색)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유키 세력( 초록색)

오다 노부나가 세력(빨간색)

 

 

 

 

 

1553년 

오와리의 내부갈등이 더 커지고 있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다케다 가문, 남쪽으로는 이마가와 가문이 오다가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대부 히라테 마사히데는 그에게 유언을 남기고 할복한다. 그 이후로 노부나가는 기묘한 행동을 자제했다고 한다.

 

1554년

오와리 종가인 키요시 오다가문의 당주 오다 노부토모가 노부나가를 제거하려 하자, 가문 2인자인 시바 요시미쓰가 이를 노부나가에게 밀고했다, 이것을 계기로 노부나가는 오다 노부토모를 제거하고, 무로마치 막부에 모든 사실을 알리고 청원하여, 단조노추 오다가문이 종가가 되었다.

 

그 뒤 그는 이마가와 침략해 오는 것을 물리친다.

 

1556년 북쪽 사이토 가문의 다이묘이자 오다노부나가의 장인 사이토 도산이 자기 아들에게 죽임당한다.

이를 계기로 오다 노부나가를 미노를 침공하지만, 고전하고 되돌아 온다. 이로서 북쪽 남쪽으로 강대국에

둘러쌓인 처지가 되자, 오다노부나가의 반대파는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노부유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한번의 전투로 진압당한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전부 용서해주는데, 이때 포함된 장수가 나중에 오다가문의 넘버원 장수 시바타 가츠이에도 포함되어있었다.

 

1년뒤인 1557년 또다시 오다 노부유키가 반란을 일으키려하자 이번에는 시바타 가츠이에가 밀고한다. 이에 노부나가는 더이상 옛날 방식으로는 나라를 통치하기에 어렵다고 판단, 병을 핑계로 노부유키를 유인해 자기손으로 동생을 죽이고, 연관되어있는 오다 가문들을 정리한다. 그 뒤 원래 행정관 가문이였던 시바 가문도 정리한다.

1559년에 완전히 오와리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만나러 간다.

내부적인 분쟁을 말끔히 해결한것이다.

 

 

 

 

 

 

 

 

 

그런데 1561년

 

 

 

 

 

 

남쪽에 대가문 이마가와 가문의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북쪽으로 다케다 가문, 동쪽으로 호조가문과 삼국동맹을 맺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오와리를 정벌하려고 올인병력 3만명을 이끌고 출진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신분적으로, 쇼군가문인 아시카가가문 다음 가문이고

세력적으로도  전국 최강세력 3손가락에 들어가는 세력이다.

 

그가 영토는 지배하는 미카와,스루가,도토우미 3국으로 석고는 60-70만석으로

(엥? 생각보다 적다.......그만큼 3국을 합쳐도 1국인 오와리 석고 57만석이 하고 비슷하니

오와리가 진짜 스타팅지역으로 너무사기였따.....)

 

 

이러한 대 침략에 대비해 막 오와리를 통일한 노부나가가 동원할수 있는 병력은 고작 2천,3천뿐...

 

 

낭중지추.....주머니속을 뚫을 바늘을 있는것일까?

 

 

항복하자는 목소리가 큰 가운데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볼 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