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잡담/한국 역사

서해 수호의 날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된 북한과의 교전 사건들

상상력사전 2020. 3. 27. 02:24

서해 수호의 날이란?

 

2000년대 들어서 서해의 방향으로 북한의 계속되는 도발로 인해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2016년에 만들어진 기념일로, 매년 3월 4번째 금요일로 정해졌다.

 

즉 북한의 서해 도발, 대표적으로

제2 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날이다.

 

 

제2 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

2002년 6월 29일에 일어난 해전으로,

당시 한국이 2002년 월드컵을 즐기고 있을 당시를 틈타 북한이 무력으로 도발한 사건이다.

사건 당시로는 서해교전이란 이름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연평해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교전에 참여한 함선은

 

한국

 

배수톤 약 1000톤 전장 88m 포항급 초계함 2척,

 

2020/02/27 - [여행/국내여행] - 포항급 초계함(Pohang class Corvette) 1번 함 포항함 내부 탐방기

 

포항급 초계함(Pohang class Corvette) 1번함 포항함 내부탐방기

포항급 초계함(Pohang class Corvette) 포항급 초계함은 북한선 구축 및 영해 수호나 함선 호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2번째 국산 초계함으로 제원은 배수량 1200m 길이 85m, 전폭 10m, 승선인원 약 100..

2mansigan2.tistory.com

배수량 170톤, 전장 37m 참수리급 고속정 6척,

 

북한

 

배수량 207톤, 전장 42m,  경비정 등산곶 1척, 고속정 등산곶 1척이다.

 

 

전투 전개는 한계선을 침범한 북한의 등산곶 초계정 1척(388호)이,

한국의 참수리급 고속정 1척(357호)을 향해 기습 발포를 시작으로,

함포와 기관포를 이용한 지근거리 함포 싸움이 시작되었다.

자세한 싸움은 다음과 같다.

 

  • 06:30 어로보호 지원을 위해 남한의 고속정 3 편대 6척 출항.

  • 09:54 북한군 경비정 등산곶 388호(155톤) NLL을 넘어 남하 시작. 대한민국 해군 253 고속정 편대 대응기동 실시.

  • 10:01 북한군 고속정 등산곶 684(215톤) 추가 남하. 대한민국 해군 232 고속정 편대가 대응기동.

  • 10:25 북한군 등산곶 684호가 탑재된 85mm 함포로 450m 거리에서 차단기동을 실시하던 참수리 357호에 기습 발사, 남한 232 편대 대응 사격. 이 과정에서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파괴되고 윤영하 정장이 전사.

  • 10:26 후방에 있던 253·256 고속정 편대 전파 사격 개시.

  • 10:30 256 편대 공격 개시.

  • 10:33 253 편대 공격 시작.

  • 10:43 제천함(포항급 초계함) 화력 지원 개시.

  • 10:47 진해함(포항급 초계함) 화력 지원 시작.

  • 10:48 제천함, 북한 스틱스 미사일 전자파 탐지, 대응.

  • 10:51 화염이 발생한 북한 경비정 다른 경비정에 예인 되어 NLL 북쪽으로 퇴각.

  • 10:56 전 전력 사격 중지.

  • 11:25 제천함·진해함, 북한의 실크윔 미사일 전자파 탐지, 대응.

  • 11:45 357호 사상자 확인·구조. 357호는 심한 선체 손상으로 예인 포기.

  • 11:59 참수리 357호 침몰.

 

 

전투 결과

 

한국 참수리 1척 침몰, 전사 6명, 부상 18명

북한 등산곶 1척 파손, 전사 13명, 부상 25명


한국이 북한의 침범을 저지했으므로,

제2 연평해전은 한국의 승리이다.

하지만, 교전 화력이 비해 한국의 피해가 큰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참수리급 고속정의 화력과 방어력

 

한국군 참수리급 고속정 6척이 북한군 장산곶 1척에 함포를 사격했지만, 파손 판정인 반면에

오히려 참수리급 고속정 1척이 장산곶 1척의 함포사격에 침몰 판정을 받았다.

 

왜냐하면 참수리급 고속정의 화력이 장산곶 보다 화력과 방어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해군에서는 화력과 방호벽을 갖추기 위해 신형 고속정을 개발하고

이 고속정의 이름이 연평해전으로 전사한 윤영하 소령의 이름 따서 만든 윤영 화급 고속정이다.

 

2. 포항급 초계함 2척의 늦장 대응 및 후퇴

 

포항급 초계함은 배수량 약 1000톤의 88m의 군함으로서,

당연하지만 40m짜리 북한군 고속정은 한 끼 간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해전이 일어난 지 18분 후, 늦은 대응에 나섰고, 그 뒤 후퇴한다.

이로 인해 참수리 고속정 57호는 집중 사격당하고 결국 침몰한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 퇴각 이유는 북한이  해안에 설치한 대함 미사일의 발사 징후가 포착되었기 때문에 후퇴했다고 밝혀진다.

 

3. 불합리한 대응 수칙

 

당시 한국은 북한과 평화모드였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

북한의 도발 대응 수칙이 느슨하게 만들어졌고,

이로 인해 참수리 고속정 침몰이라는 참사가 벌여진다.

 

당시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순서로 대응해야 했고,

차단기동, 즉 함선으로 밀어내는 행위를 하기 전까지 우리가 먼저 사격을 해서는 안되었다.

 

연평해전 후  대응 수칙을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2009년에 일어난 대청해전 때 우리 해군은 한계선을 침범한 북한의 경비정을 우주 관광 보냈다.

 

 

 

 

 

 

천안함 피격 사건

 

2010년 포항급 초계함인 천안함이 북한의 잠수정에 어뢰 공격으로 침몰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한국군 해군 46명이 전사했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 천안함이 원인 불명으로, 두동각이 나 장병들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떴고,

 

당시 천안함 침몰 원인으로 기뢰설, 좌초설, 보수세력의 조작설 등등이 있었지만,

전 세계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의 부서진 흔적, 지진파 및, 사고지역에 어뢰의 파편, 북한군 함선의 사건 당시 행방 묘연 등등을 근거로 북한군에 의한 사건으로 판명 났다.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로

 

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C%95%88%ED%95%A8_%ED%94%BC%EA%B2%A9_%EC%82%AC%EA%B1% B4#%EB%8C%80%ED%95%9C%EB%AF%BC%EA%B5%AD_%ED%95%A9%EB%8F%99_%EC%A1%B0%EC%82%AC%EB%8B%A8%EC%9D%98_%EC%A1%B0%EC%82%AC_%EA%B2%B0%EA%B3%BC

 

천안함 피격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 글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2015년 4월) 인양되는 천안함 함미 천안함 피격 사건은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 772 천안이 조선 인민군 해군 잠수함의 어뢰에 의해 격침된 사건이다.[3][4] 이

ko.wikipedia.org

 

 

 

당시 정치적 인식으로 인한 천안함 사건의 해석 변화

천안함 피격 사건은 지금으로서 북한의 도발로 확실시되었지만,

 

웃기게도 당시에는 정치적인 스탠드에 따라 사건의 해석이 달라졌다.

 

보수 쪽은 인간어뢰 같은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며 무리수를 던졌지만 

그래도 명확하게 북한이 저지를 도발 인식된 반면,

 

진보 쪽 대부분은 천안함은 암초에 침몰한 사건이며,

보수세력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인식되었고,

전 세계에서 조사한 결과 북한이 저지를 짓으로 확실시되자,

이번에는 희생된 장병들을 패잔병 새끼들 취급, 혹은 조작범 취급하며

오로지 보수세력이 조작한 사건으로 취급하고

우리가 잘못한 사건인 것처럼 인식했으며,

아직도 천안함이 조작된 사건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왜 이렇게 잘 아냐면, 천안함 일어날 당시 학창 시절 나는 정치적 스탠스가 진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에 나는 천안함이 북한군이 저지른 게 아닌 보수세력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 생각했고, 증거가 확실시될수록, 총풍사건을 생각하며 자기 합리화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에서 인간어뢰 같은 개소리를 할 때마다 내 잘못된 확신에 합리화는 단단해졌다.

 

 

실제로 지금도 이름을 말하기 싫은 선생께서,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에 출연해서 천안함 장병들에게 패잔병 새끼니 뭐니 하던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또한 현재까지도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서는 천안함 유족들을 향해 조작범이라면서 욕하고 있다.

 

 

나는 현재 나이 먹고 머리 쓰는 것을 다른 사람처럼 어느 정도 흉내 낼 때가 될 때 쯤,

그 때를 돌아보며 잘못된 생각을 후회하고 있다.

 

 

연평도 포격 사건(2011년 11월)

 

 

 

 

 

천안함 피격이 일어난 지 2개월 후,

북한이 이번에는 한국 영토인 연평도를 향해 기습 포격한 사건이다.

원인은 김정일의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의 권력 강화 때문이다.

 

 

한국이 전사 2 명, 부상 16 명, 민간인 사망 2 명, 민간인 부상 3 명을 피해 입었고,

북한은 우리 측의 k9자주곡사포의 대응 사격으로 우리 피해에 몇 배 이상을 받았다.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한국은 육, 해, 공군을 총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미국이 연평도 포격 도발이 국제적인 전쟁으로 확대될까 봐 우려하여, 한, 미간에 협의 끝에,

해안포대에 보복 공격하는 수준으로 끝났다.

 

그 이후 미군의 핵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가 지원 오는 등

전쟁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었지만, 미국 측에서도 확대되는 것을 반대하고,

우리 측도 마땅히 대응방법이 시원치 않아,  

결국, 연평도 포격 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건 역시 천안함처럼 정치 스탠드에 따라 해석을 달리 했다. ㅠㅠ

특히 이 사건 때 역시 나는 진보 쪽의 스탠드 였는데, 

당시 진보 쪽 사람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했나면,

이 사건은 북한이 저지른 사건인데, 아무 상관없는 보수세력을 욕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말하기 부끄럽고 쪽팔린다.

당시 나 같은 진보쪽 사람들은 진짜 부끄러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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