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잡담/한국 역사

박정희, 남조선로동당에 가입하다.

상상력사전 2020. 3. 29. 21:56

 

 

 

 

경제개발로 대한민국을 역사상 최전성기로 이끈 박정희.

그의 정당은 대대로 보수진영, 우익이었으며,

그 자체로는 강력한 반공정책을 시행한 인물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보수진영의 대표상징으로 기억되는데,

 

그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다.

 

 

 

 

 

바로 박정희는 좌익중에 급진좌파 정당,

거기다 골수 공산당 그 자체인, 남조선로동당(남조선노동당) 당원이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서는 박정희 가족에 대해 알아야 한다.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

 

박성빈은 조선시대의 몰락한 양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20대에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동학에서 접주 자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했고,

동료들은 전부 반란군으로서 처형되었을 때 혼자만 살아남은 이력을 지녔다.

 

 

이를 계기로 박성빈은 완전히 세상에 관심을 끊기 위해,

경북 구미로 가서 소작농으로 지내며 세상과 등지며 살았다.

 

이로 인해 박성빈은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고,

박성빈 대신에 아들 박상희가 막내아들 박정희의 아버지 역할을 했다.

 

 

박정희의 아버지 같은 형, 박상희

 

박상희는 박정희의 형으로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대에 좌우합작 운동 신간회에 참여하여 간부로서 활동했다.

 

 

 

 

 

 

1934년 항일 민족신문인 조선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1년 뒤 동아일보 구미 지국장으로 활동했다.

1944년에는 여운형의 조선 건국동맹에 참여했다가, 체포, 그 뒤 한국은 해방된다.

 

 

 

 

 

 

 

해방된 뒤 한국에서는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는데,

언론인의 경력 및 신간회로서 항일활동의 이력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경북 구미 지역의  지식인, 독립운동가 그룹의 리더가 된다.

 

 

 

 

 

 

 

이런 박상희를 박정희는 가족을 떠나, 인간적으로 존경했고,

박정희에게 그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아버지의 역할을, 박성빈 대신에, 박상희가 대신 했는데,

박정희가 만주행을 택했을 때 훈계하였고,

박정희가 아내 김호남과 잠자리를 거부하자, 두들겨 패서 같은 방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 같은 박상희는 해방 후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입, 조선공산당의 간부가 된다.

그리고 대구 10.1 사건에 참여하다가, 진압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총을 맞고 사망한다.

( 박상희가 죽은 뒤 조선공산당은 합당하면서 남조선로동당으로 변한다.)

 

 

 

 

아버지 같은 형을 위한 복수

 

박상희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들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일생을 살면서 교사나,군인을 했지, 좌익활동은 해보지도 않았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박상희의 죽음은 그에 인생을 180도 바꾸었다.

그는 당시 국군 1 연대 중대장으로서 군인이었는데,

직업과 정반대로, 남조선로동당에 비밀당원으로 가입하고, 박상희의 직책을 이어받아 간부가 된다.

 

 

근데 실은 박상희가 죽기전에서 당원만 아니였지,

자기 형한테 도움주려고, 군 내부정보를 형한테 일러바침 ㅋㅋㅋ

 

 

 

 

 

남조선로동당의 정부전복 시도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 극비 문서에 따르면 

남조선로동당은 1950년 최고 간부였던, 이주하과 김상룡이 체포될 때까지 활동했다.

 

이주하, 김상룡과 동률 최고 간부로 이중업이 있었다.

그는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인재 포섭 및 게릴라전을 시행했는데,

인재 포섭중 군인들을 많이 포섭 시도했고, 그중, 박정희가 성공적인 사례였다고 한다.

 

 

 

 

 

 

 

이처럼 남조선로동당은 군인들을 많이 포섭했고,

한국 광복 후 여수. 순천 사건, 6 연대 사건, 7 연대 사건, 2 연대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는 모두 남조선 노동당의 작품이다.

여기서 살아남은 군인들은 한국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정부 전복을 위한 게릴라전을 시행했다.

이때 박정희도 비밀당원으로서, 활동을 했을지 안했을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후에 박정희가 체포 된 후 조사결과, 활동전무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활동 안하면 프락치 처분 당해서 처단 당하는데,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활동은 했을것이다.

 

 

워싱턴 주재 현 한국 대사인 김정열 중장은 이중언과 박정희의 친분 사실을 증언한다.

지금은 퇴역한 최경록 중장은 이들이 이중업이 즐겨 찾던 명월관에서 몇 차례 함께 술을 마시는 걸 목격한 바 있다고 증언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한 한국 정부 전복 도표를 본 어느 한국군 장교는 거기에 박정희의 이름이 주요 군 장교로 나타나 있더라고 회상했다.


 

박정희의 체포

박정희는 여수 순천 사건이 끝난 뒤, 수사에서  1948년 11월 김창룡 중위에게 체포된다.

박정희는 수사대상이 되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1949년 2월 사형 선거를 받는다.

 

 

 

 

박정희의 사면과 부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의 동창생들이 육군 고위직에 있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은 참회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남조선로동당의 조직망을 폭로한다.

 

이로 인해 수백 명의 사람이 검거되었고, 

이 때문에 채병덕 참모총장과 정일권 부참모 총장, 백선엽 장군(당시 중령)은 박정희 구명을 탄원했고,

그는 감형에 이른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는 백선엽 장군의 추천에 의해 다시 군 복무를 하고, 활약하여 군 장성에 이른다.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이 되기까지 이른다.

 

 

 

 

 

 

 

 

 

 

 

 

 

 

여담)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은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했지만,

그는 아버지를 싫어하지는 않았던거 같다.

실제로 박정희의 친구들이 아버지가 참여했던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난이라고 부를때, 그는 동학농민혁명이라 부르고,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의 묘에다가 아버지가 올랐던 관직이름을 비석에 박아서,

"부사 효력부위 박성빈지묘"라는 비석이 세웠다.